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밀양 천진궁은 천손의 아들 단군을 모신다.

천부인권 2010. 3. 21. 13:30

 

 

 

밀양 영남루를 가면 영남루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천진궁을 만나게 된다. 보통은 영남루에 딸린 부속건물 쯤으로 알고 주의 깊게 보지 않는데, 생각해서 보면 우리나라를 있게 했고, 나를 존재케 해준 천손의 아들 단군할아버지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의미심장한 곳이다.


 

 

 

원구단 복원과 원구단 단군 제천권 회복운동 [4]에 의하면  『한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제일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천손장자 민족으로 매년 10월 상순에 둥근 단을 쌓고 단군께서 친히 국태민안(國泰民安)을 하늘에 기원하는 천제 올렸습니다. 이 천제'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조선 세조임금 때는 천제를 나라의 최대행사로 제도화하여 세조 3년인 1457년부터 매년 천제를 지냈으나 천자가 아닌 왕이 하늘에 제를 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중국의 압력과 사대주의자들의 강압에 의해 1464년 천제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가, 이로부터 433년이 지난 후 고종 때에 이르러 '천제'를 복원해야한다는 의정 심순택의 상소를 가납하여 팔도의 가장 명당 명소 길지인 소공동에  '원구단'을 세우고 '제천권'회복과 함께 대한 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 즉위식을 올리고 자주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엔 일제와 친일파들이 이를 시기 질투하여 '천제'는 천조대신의 만세일개인 일본 천황만이 지낼 수 있다며, 또 다시 강제 폐지하고 오늘까지 일본천황이 단군 제천권을 대신 행사해오고 있으니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입니까?』라고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바로 찾지 못하면 항상 남의 종노릇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얼을 찾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출발해야하고 그 출발의 시발점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밀양에 천진궁이 있다는 사실을 블로그에 글을 써서 알리는 것도 사실은 상당히 조심스럽다. 우리민족의 정신인 단군상이나 태백산의 제단 등이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훼손당하는 일들이 자행되는 나라이다 보니 또 어떤 돌발행동을 하는 무리가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천진궁 입구에 서있는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천진궁(天眞宮)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밀양시 내일동 40
 천진궁(天眞宮)은 1665년(현종6)에 건립되었다. 원래 이 건물은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位牌)를 모신 공진관(拱振館)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으나, 1722년(경종 2)부터 공진관을 대신해 위패를 보관하며 객사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헌병대가 이 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하였다.

 

천진궁은 남쪽을 향해 중앙에 단군(檀君)의 영정과 위패를, 그 왼쪽 벽에 부여, 고구려, 가야의 시조(始祖)왕과 고려 태조의 위패를, 오른쪽 병에는 신라와 백제의 시조 왕과 발해 고왕(高王), 조선 태조의 위패를 각각 모시고 있다. 1957년에 대대적인 수리와 함께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문을 만덕문(萬德門)이라 하였다.

 

이후 매년 봄. 가을로 어천대제(御天大祭, 음력 3월15일)와 개천대제(開天大祭, 음력 10월3일)를 지내고 있다. 천진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의 주심포(柱心包)식 건물로, 대리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높은 기둥을 세워 건물의 권위와 웅장함을 더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건축적 가치에 앞서, 일제가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역대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감옥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해방 후 이를 복원하려는 지역민의 노력도 단지 옛 건물의 복원이 아니라 민족의 전통성 회복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이 지방민의 민족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