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전 구형왕릉이라 전하는 수수께끼 탑

천부인권 2010. 3. 20. 15:07

 

 

 

 

 

가락국 제10대 왕인 구형왕이 이궁대에서 신라에 항복하고 기락국의 별궁인 태왕궁(太王宮,별칭으로 水晶宮)으로 들어와 침거를 하다 5년 후 운명을 달리하여 왕산 앞에 사적 제214호인「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을 남겼다고 전한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가락국(駕洛國, 金官伽倻) 10대 구형왕릉으로 전해지는 특이한 석조물(石造物)이다. 동쪽으로 내려오는 경사면에 피라밋 모양으로 자연석을 쌓아 올렸다. 위로 올라갈수록 면적을 줄여가며 모나게 일곱 단을 쌓아 올렸는데, 전체 높이는 7.15m이다. 각 단 앞부분의 양쪽에는 모서리가 분명하지만 뒤쪽은 경사면에 붙여 돌을 쌓아 모서리가 없다.

네 번째 단에는 가로 40cm, 세로 40cm, 깊이 68cm의 감실(龕室)과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다. 감실은 신주를 모시거나 등잔을 두기 위해 만들어 지지만 여기에서의 용도는 알 수 없다.
앞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새긴 비석이 있고 돌담으로 주위를 둘렀다. 문무인석(文武人石), 돌짐승,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등도 배치되어 있으나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이라는 명칭은 확정은 없고 그렇게 전해진다는 뜻으로 부쳐졌다. 발굴조사는 아니지만 신라대학교 박물관의 조사에 따르면 왕릉과 같은 고분일 가능성은 아주 적을 것이라 한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아래쪽에 있는 암자 부근에 왕산사(王山寺)가 있었다고 기록되었고, 지역의 전승에서는 약 200년 전에 왕산사에서 활, 칼 등과 함께 왕릉에 대한 기록도 나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산을 다 내려간 입구에는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을 모시는 덕양전(德讓殿)이 있다. 덕양전 경내에는 홍살문, 영정각, 안향각, 정숙당, 추모재 등의 건축물과 연못이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16일과 9월 16일에 제향(祭香)이 올려지고 있다.』

 

 

 

안내판에서도 적어두었지만 전(傳)이라는 것은 소위 말해 “카더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안내판에서 풀지 못한 "감실은 신주를 모시거나 등잔을 두기 위해 만들어 지지만 여기에서의 용도는 알 수 없다."라 했는데, 석탑이라면 이 감실의 용도가 바로 나타난다. 이 조형물은 무덤이 아니라 석탑이라고 주장하는 믿을 만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전 구형왕릉 이야기 - 진실과 절박함의 싸움

 

아무튼 결론은 이 유적은 왕릉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숱한 정황상의 증거가 있지만 막상 사학자들이 조사를 해보니 이것은 가야의 왕릉과 양식도 맞지 않을 뿐더러 왕산사기의 기록도 당시의 카더라였기 때문에 믿을만한게 없었지요. 좀 더 조사를 해보니 의외로 이것은 가야시대의 불교 탑이었습니다.

 

 

구형왕이 이궁대에서 신라에 항복을 하고 왕산이 있는 곳으로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전 구형왕릉’이 무덤이 아니라면 구형왕의 무덤은 현재로서는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곳 아래 주차장 맡은 편에는 구형왕의 손자 김유신이 용화향도를 이끌고 지리산 자락을 돌며 훈련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활 쏘는 연습을 했다는 사대비가 세워져 있어 김해 김씨나 관광명소가 필요한 산청군에서는 구형왕릉이라고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금관가야의 멸망과 함께한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무덤이 있다하여 억지로 시간을 내어 찾아 왔는데 막상 불교의 탑이라니 소설한번 멋지게 쓸려고 생각한 것이 허망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