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향토민속자료 제1호 명곡동 석제단>
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 1994년에 창원시 전역에 걸친 문화재 및 향토자료와 향토민속자료 등을 조사한바 있어 그 자료집에서 설명하고 있는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그 자료집의 제목은 “문화유적분포지도 창원시”인데, 482개의 자료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재들은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중요무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시.도지정문화재 등 나름의 이름들이 있다. 그러나 비지정문화재들은 일반동산문화재, 매장문화재 등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문화유적분포지도 창원시”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들 중에는 아예 이런 것들에도 빠져 있을 수 있는 것들도 있어 지금부터 내가 나름의 이름을 정해 주기로 한다.
앞으로는 창원시에 분포하고 있는 비지정문화재들에 창원향토자료, 창원향토민속자료, 제몇호로 지정을 할 것이다. 그 첫 번째로 “창원향토민속자료 제1호와 제2호, 제3호”를 정하는데 정하는 기준은 내 마음대로 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도통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것부터 ‘제1호’라는 이름을 부쳐본다.
‘명곡동 석제단’을 찾아가보니 태복산을 오르는 길가에 연접해 있었는데, 지나는 등산객과 이곳에 농사를 지어로 오시는 분들은 아무른 관심도 없었고 궁금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현재는 이 석제단에 제를 올리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창원향토민속자료 제1호 명곡동 석제단>
창원대박물관에서 조사한 내용을 옮겨 적어둔다.
유적명 : 『명곡동 석제단(明谷洞 石祭壇)
유적번호 : 창원향토민속자료 제1호
주소 : 창원시 명곡동 산 13
위치 : 위도 35°14'54.0"N 경도 128°37'47.0"E
명곡고등학교 뒤쪽의 태복산을 오르는 산중턱 산책로에 있으며 속칭 ‘정지골’에 위치한다. 이 유구는 개석부(開石部)가 석곽형 구조를 취하고 있어 지석묘나 석곽묘로 잘못 인식할 수도 있겠지만 동읍 단계리나 봉산리 석제단과 유사한 형태이다.
구조적 특징에 대해 살펴보면 유구는 동서축의 능선방향에 맞게 개구부가 서쪽을 향하도록 설치된 석축 구조물이다. 능선의 기슭에 의지하여 다듬은 돌의 반듯한 면이 정면을 향하도록 양벽을 쌓고 그 위에 양벽의 앞면과 맞게 개석을 걸쳤다. 개석은 화강암제의 평편석 1매를 앞쪽으로 당겨 걸치고 뒷부분은 할석으로 메웠다. 뒷면은 내부 퇴적토로 인하여 확실하게 관찰 할 수는 없으나 따로 벽을 쌓지 않고 구릉의 기슭을 그대로 이용한듯하다.
석제단의 입지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유구의 앞으로는 정지골의 가를 따라 산책로가 개설되어 있고 유구는 산책로와 연한 기슭에 능선의 축과 맞추어져 설치되어 있다. 이는 축조당시 전면의 길이를 염두에 둔 초치라고 생각 되는데, 유구의 정면이 길 쪽을 향해있으므로 길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석의 가로 너비 140cm, 두께 39cm이며, 제단 안 너비 90cm, 안 높이 65cm이다.』
<창원향토민속자료 제2호 봉산리 석제단>
봉산리 석제단을 찾는 것은 참 힘이 들었다. “문화유적분포지도 창원시”에는 지번에도 없는 송정리로 소개를 하고 있어 아예 찾을 수가 없었고 추측하여 그 일대를 돌면서 수소문을 하니 운 좋게 딱 한분을 만나 ‘봉산리 석제단’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앞으로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면 봉산리에 석제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추측된다.
<창원향토민속자료 제2호 봉산리 석제단>
산중턱에 석제단이 있었던 것은 그곳에 옛날에는 당산목이 있었고 당산목에 제를 지내기 위해 제단을 쌓은 것이라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지금은 농협 앞에 있는 회화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기 때문에 석제단은 마을사람들의 기억에서는 지워졌다고 말씀을 남겼다.
교회 앞에 주차를 하고 산행을 하여 찾아보니 석제단의 주위가 온통 묘지였고, 석제단 앞 입구에도 묘지가 있어 묘지 속에 석제단이 있는 형상 이었다. 이곳에서는 단계리 석제단이 내려다보인다.
<창원향토민속자료 제2호 봉산리 석제단>
창원대박물관에서 조사한 내용을 옮겨 적어둔다.
『봉산리 석제단(鳳山里 石祭壇)
창원향토민속자료 제2호
창원시 동읍 봉산리 산46
봉산마을 뒷산 정상부의 평편한 사면에 위치하며 주변에 묘지가 있어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 제단에서 마을공동의 제를 올린다고 한다. 제사는 음력 1월 중에 하루를 선택하며 제주는 작년에 했던 사람도 가능하다고 한다. 제주가 된 사람은 1년 동안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정성스럽게 가다듬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장을 보러 갈 때에도 남들을 보지 않고 나쁜 것을 보지 않기 위하여 삿갓을 쓰고 장을 보러가기도 하였으며,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굿터에서 밥을 지어 올려야하며 일주일 전부터 매일 찬물에 목욕을 하여야 한다고 한다. 제기도 매해 새로 장만하여 사용해야하며 정성을 들인 주민 중 50세에 아들을 낳으면 돌제단의 영험함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돈을 많이 번다고 한다. 제는 20년 전부터 지내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제를 지내는 경우는 있다고 한다.
제단이 위치한 방향은 정확하게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형태는 뒷면에 길이 2m, 높이 110cm, 폭 23cm의 넓고 평편한 판석을 남북향으로 세우고 좌측에 역시 길이 2m, 높이 95cm, 폭 10cm의 판석을 세웠다. 우측편은 좌측과 달리 산석을 3매정도 이용하여 쌓은 후 상석을 올렸다. 상석은 길이 240cm, 폭 110cm, 두께 15cm의 평평한 돌로서 긴 장타원형이다. 앞부분 우측에는 높이 150cm의 방형 기둥을 세웠으며 좌측에는 비석모양의 판석을 세워 앞을 막았다. 상석 밑에 형성되어 있는 방의 크기는 1.65×1m이며 장방형이다.』
<창원향토민속자료 제3호 단계리 석제단>
정확한 위치만 안다면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곳이다. 석제단 앞에는 제법 공터가 있고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1994년 창원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단계마을 뒤쪽으로 뻗어 내린 정병산의 한 지릉인 능선상에 위치한다.” 고 되어있다. 창원향토민속자료 제1호와 제2호의 바닥은 흙인데 비해 단계리 석제단은 바닥을 납작한 돌로 깔아 두었다. 그리고 잘 정돈이 되어 있어 요즘도 제를 지내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창원향토민속자료 제3호 단계리 석제단>
창원대박물관에서 조사한 내용을 옮겨 적어둔다.
『단계리 석제단(丹溪里 石祭壇)
창원향토민속자료 제3호
창원시 동읍 단계리 634
현재 능선의 중앙으로 농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제단의 앞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북서쪽으로 400m 떨어진 곳에 봉산리 돌제단이 있으며 이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제단이 설치된 곳은 능선의 평탄지 이며 제단은 동북향으로 능선의 종선과 일치한다. 제단을 향해 서면 제단의 남서쪽으로 정병산의 정상과 마주보게 되는바 이는 정병산의 주봉을 향해 제를 올리도록 기획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단계마을에 살고 계시는 양종무(78) 할아버지에 의하면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나 예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며 특별한 제사를 지내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고 한다. 지금도 제단의 한쪽 구석에는 촛불의 흔적을 확인 할 수 있으며 제단의 앞쪽으로는 소금이 드문드문 뿌려져 있다.
형태를 살펴보면 바닥에 길이 116m, 폭90cm, 두께 15cm 정도의 석재를 깔고 뒤쪽으로 2매의 석판을 수적 하였다. 좌우 역시 높이 117cm, 폭 110cm의 평편한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길이 160cm, 폭110cm, 두께 30cm의 상석을 올렸다. 돌제단의 앞쪽에는 단계마을의 당목이 있었다고 하나 태풍에 부러지고 그 후 불이나 소실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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