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일제의 잔재가 문화재로 바뀐 밀양 구 비행기 격납고

천부인권 2010. 4. 29. 17:30

 

 <밀양 기산리 비행기 격납고>

 

단군이 개천을 한 후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온 나라를 조선이 일본에 의해 멸망하면서 가장 혹독한 민족의 시련을 겪은 시기가 1910년~1945년 8월15일까지 일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정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세상의 공적이 되었을 때 그 당시를 살아간 우리 조상들의 피해는 상상을 불허한다. 35년간 나라 잃은 서러움을 이용하여 자신만 잘살고자 민족을 배신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후손이 아직도 큰소리치면서 사는 세상이다.


그리고 칠십년이 지난 지금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할 당시 연합군의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 둔 ‘밀양 구 비행기격납고’가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제206호로 등재되어 일제의 잔재도 문화재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밀양 기산리 비행기 격납고 측면>

 


부슬거리는 비를 맞으며 찾아간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 1378번지와 상남면 연금리 1072번지에 있는 ‘밀양 구 비행기격납고’는 연접 마을에 비슷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양쪽은 산으로 되어 있고 앞쪽은 길게 직선을 이루어 비행기가 확 트인 밀양벌판으로 나가게 되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격납고는 터널형으로 지름 약13.6m, 높이 약3.1m, 길이 약13m의 철근 콘크리트구조물로 두께는 약 25cm정도이다.
내부표면이 가마니 무늬가 선명한 것은 격납고를 만들 때 흙을 반월형으로 모양을 만든 후 그 위에 가마니를 놓고 콘크리트를 부어 고정한 다음 흙을 제거하는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밀양 연금리 비행기 격납고>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 1378번지에 있는 ‘밀양 구 비행기격납고’는 앞쪽의 밭에 철조망이 쳐져있어 접근을 하기 어려웠고 안에 농사에 필요한 기구 같은 것을 넣어두고 있었고, 상남면 연금리 1072번지에 있는 ‘밀양 구 비행기격납고’는 안에 집을 지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밀양 연금리 비행기 격납고 측면>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밀양 구 비행기격납고
등록문화재 제206호
1940년대

 

이 시설물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군의 레이더와 폭격을 피하기 위해 만든 비행기 격납고이다. 일부 훼손된 부분이 있지만 전면의 아치형 개구부와 곡면형 일체식 구조가 잘 남아 있으며,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의 밀양지역에서의 전투준비 사항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