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신라충신 죽죽의 충절 이야기와 비문 해석

천부인권 2010. 5. 2. 18:45

 

 


황강이 휘돌아 지나는 대야성 자락에는 여러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중에 합천의 대표적 명소인 함벽루로 들어가는 길목에 비각 하나가 서있어 올라가보니 ‘신라충신 죽죽지비(新羅忠臣竹竹之碑)’라 적은 비각 안에 비석이 있습니다. 바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인 ‘신라충신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벽루로 간다고 무심코 지나기 쉽지만 안내판에 적어둔 내용을 읽고나면 죽죽의 충절 앞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비의 비문은 합천 출신으로 진주 목사를 지낸 한강 정구의 제자인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가 지었고 1644년(인조 22년) 합천군수 조희인(曺希仁)이 세운 것이라 합니다.

죽죽(竹竹)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니 삼국사기에 '대야주 사람으로 찬간의 벼슬을 한 학열(郝熱)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화랑이었다는 것입니다.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의 휘하에서 그를 보좌하는 역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新羅忠臣竹竹之碑
按新羅善德主時百濟一萬兵來攻大野城城主 金品釋出降幢下竹竹諫不見用則 迺收殘兵閉城門力戰死之 噫謂之歲寒後凋者非耶 眞不負其名者哉公大野人撰干郝勢之子 其名與其地人到今稱之 而識者歉其無徵 今曹侯希仁懼夫愈久而泯伐石 而竪諸里九百年之 幽光於侯乎 發之侯之於風敎功豈微哉 余則曰 賢於寒山共語者遠矣是用識
龍集乙酉十月上澣 晋陽 姜大遂記


신라충신 죽죽(竹竹) 비

신라 선덕왕 때의 일을 상고하건대 백제 병사 일만이 와서 대야성(大耶城) 공격하자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은 내려가 항복하였다. 깃대 밑에 있던 죽죽(竹竹)이 간했으나 듣지 않자 이에 남은 병사들을 수습해 가지고 성문을 닫고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아! 이것은 추운 겨울을 지난 뒤에 잎이 마른다는 것이 아니랴. 이는 진실로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음인저! 공(公)은 대야(大野) 사람으로 찬간 학세(撰干 郝勢)의 아들이다. 그 이름과 그 땅 이름을 사람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칭하여 일컫는다. 그러나 식자(識者)들은 그 증거가 없는 것을 서운하게 여겨왔다. 이에 조희인(曹希仁)이 더 오래되면 아주 없어 질 것을 두려워하여 돌을 다듬어 그 마을에 세웠으니 9백 년 동안 어둠 속에 묻혀있던 빛이 조후(曹侯)로 인해서 퍼져왔으니 목사가 풍교(風敎)에 끼친 공이 어찌 적다하랴. 내가 이에 이르기를 “어진 이가 추운 산중에 있어 더불어 얘기하는 이가 멀어지네.” 이것으로 쓰노라.
을유년(1525년) 10월 10일 진양(晋陽) 강대수가 쓰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신라충신죽죽비(新羅忠臣竹竹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152

 

이 비는 642년(신라 선덕여왕 11)에 대야성(大耶城)에서 전사한 죽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신라의 대야성은 642년에 윤충(尹充)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포위 되었다. 이때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에게 아내를 빼앗긴 검일(黔日)이 창고에 불을 질러 성안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 전의를 잃은 김품석은 부하인 죽죽의 만류를 뿌리치고 항복하였다. 그런데 백제군이 항복하러 나온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자 김품석은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였다.

 
죽죽은 남은 병사를 거느리고 싸웠으나 백제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 이름을 지은 것은 추울 때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 항복하리요”라고 말하고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죽죽의 이런 충절(忠節)과 용맹을 들은 선덕여왕은 그에게 급찬(級湌)의 관등을 내리고 그 처자들을 왕도(王都)로 옮겨 살게 하였다.

 
높이 1.4m, 폭 54cm의 화강암으로 세운 이 비석은 죽죽의 충절을 기리고 그 뜻을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1644년(인조 22)에 합천군수 조희인(曺希仁)에 의해 건립되었다. 비문은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1591~1658)가 지었다.

 


출처 및 참조

한사선생문집-강한영/한가람전산주식회사(1995.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