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생각하다

재잘단의 ‘우리 마을 탐험기’ 7월 이바구

천부인권 2010. 7. 19. 23:10

 

 

 

 2010년 4월부터 12월까지 사)지역문화공동체 경남정보사회 연구소에서 “2010년 지역사회 문화예술 교육활성화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창원평생학습시설인 의창, 사림, 봉곡, 중앙사회교육센터에서 운영하는 ‘재잘단의 두근두근 우리마을 탐험기’는 지역초등학생들을 상대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알고 문화와 역사를 알아가는 방과 후 교육입니다.

 

 

 

아이들과 공부를 한지도 4개월이 지나고 이제 제법 얼굴을 익힌 사이들입니다. 처음부터 아이들은 시끌벅적 요란했지만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고 자신들의 주장을 똑 부러지게 하는 편입니다.

 

이번에는 실내 교육을 한 시간하였는데, 고지도와 현대지도 그리고 집안의 묘지도를 비교하면서 어떻게 우리 마을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퀴즈문제를 내면서 정답을 맞히면 선물로 연필 한 자루씩 주었는데 아이들은 이 연필 하나에 열정을 다합니다.
그렇게 목청을 다해 소리치며 정답을 맞히고는 정작 하나도 못 맞힌 아이들에게도 하나씩 나누어 가지는 것을 보면 마음 씀씀이도 꽤 멋진 친구들입니다.

 

 

 

순흥안씨의 세거지 이면서 재실 역할을 하고 있는 ‘퇴산서당’을 방문하였습니다. 아이들의 관심은 순식간이며 상당히 즉흥적입니다. 솟을삼문인 경덕문(敬德門) 앞에서 서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막상 문이 열리자 할일이 따로 있다는 듯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퇴산서당을 한바퀴 휙 돌고서 이제는 다 알았다는 듯 끼리끼리 재잘 됩니다. 이럴 땐 퀴즈가 최고 입니다.

 

[이 서당은 임진왜란 때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사헌부감찰 안민(安)과 그의 큰아들 안신갑(安信甲) 부자를 기리기 위해 봉림동 적암(赤巖) 아래에 건립한 사우(祠宇)였는데, 뒤에 사학(私學) 교육기관인 서당으로 이용되었다. 1652년(효종 3)에 창건하였으나, 1854년(철종 5)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광복 이후 1957년 현 자리에 중건하여 서당으로 운영하다 1990년에 다시 지었다.
담장의 오른쪽 귀퉁이에는 "順興安氏世居" 비가 세워져 있으며, 서당 본채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와가이며 敬德門은 솟을삼문 형식의 맞배지붕이다.]

 

 
여러분! “‘퇴산서당’이 물러날 퇴(退), 뫼산(山)을 이름으로 정한 뜻은 개구리가 멀리 뛰기 위해 다리를 움츠리듯이 크게 나아갈 때를 기다렸다가 힘차게 나아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이쯤 되면 정작 문제는 나가지도 않았지만 저요!, 저요! 요란스런 소리로 아이들은 화답을 합니다.

 

퇴산서당 앞 짜투리 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공원 내에는 어떤 식물과 나무가 있는지 찾아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또 다른 목적지 봉림사지 삼층석탑이 있는 상북초등학교에 도착하여 전번에 찾아간 봉림사지와 오늘 지도공부 중에 언급한 진경대사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봉림사지 3층석탑(鳳林寺址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경상남도 창원시 봉곡동 18(상북초등학교)

 

이탑은 원래 봉림사 터(경상남도 기념물 제127호)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될 목적으로 부산까지 팔려갔다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그 동안 관리가 소홀하여 심하게 파괴되었던 것을 1960년에 창원 교육청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1995년에 봉림사 터를 발굴 조사할 당시 본래 탑이 놓였던 자리가 발견되었다.

이 탑은 2중의 받침대(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었지만 여러 차례 옮기는 과정에서 재료(部材)의 일부가 유실되고 파손도 심하여 제 모습을 잃어버렸다. 없어진 받침 부분과 2 . 3층의 지붕돌 및 꼭대기 부분(上輪部)은 뒤에 복원한 것으로, 원래의 재질이나 조각 기법과는 차이가 있다. 이 탑에서 특이한 것을 2층 탑신에 새긴 장방형의 문짝(門扉)이다. 문짝 조각은 보통 1층의 몸통에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시대의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석탑 앞에 놓여 있는 석탑의 상륜부 보개로 보이는 것이 꽤 큰 것으로 보아 전번에 발견한 옥개석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옥개석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