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향교와 뿌리

곤양향교(경남 유형문화재 제221호)를 찾아서

천부인권 2010. 8. 21. 07:50

 

 

 곤양향교 입구 풍화루 전경

 

환덕리 조씨고가에서 바닷길을 따라 가다보면 끝없이 나타나는 갯벌을 보게 된다. 바다를 육지로 만들려는 노력은 일제 때 龜岡(가메오카)이가 1920년대 간척(干拓)사업으로 방조제(防潮堤) 언(堰)을 막아 많은 농토(農土)가 개간(開墾) 하였는데 이를 구강(龜岡)이 들이라고 불렀다한다.

[곤양향토사 자연과 땅이름]에 의하면

 

“당시(當時) 일제 강점기(日帝 强占期)라 자기 나라 동양척식(東洋拓殖) 주식회사에서 개간(開墾) 사업자금(事業資金)을 받아 공사를 했는데 많은 인부(人夫)가 동원(動員)되었고, 그 때의 장비(裝備)라고는 삽ㆍ괭이ㆍ지게로 작업(作業)했으니 둑과 제방을 쌓는 공사(工事)가 장기간(長期間) 걸릴 수밖에 없었다. 현장(現場)사무소가 동천(東泉) 아랫마을에 설치(設置)되고 많은 사람이 붐비게 되니 동네 이름을 회사(會社)라고 불렀다. 언(堰) 길이 150m의 큰 둑이 쌓이고 수문(水門) 두 개를 설치(設置)했는데 조수(潮水) 간만(干滿)에 따라 열리고 닫히고 하였다. 만조(滿潮)때에 수문은 닫혔는데 비가 많이 와 내수(內水)가 만수가 되면 양수(揚水)펌프를 큰 발동기로 작동해 내수를 퍼 내었다. 그러나 홍수(洪水)가 나면 그 장비 시설로는 역부족으로 늘 침수(浸水)가 반복되었다.

10년 뒤에 현재의 언(堰)을 고동(古洞)개 끝에서 점복개(占卜介) 쪽으로 막아 새언이라고 부르고 옛날 언은 구언(舊堰)이라 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개간(開墾)된 논은 600평 단위로 바둑판 같은 들이 이루어지고 면적(面積)이 수 백 정보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리(水利)와 치수(治水) 시설(施設)이 따르지 못하여, 개간 후 수십년 간은 가물면 염분(鹽分) 때문에 작물(作物)이 벌겋고, 비가 많이 오면 홍수(洪水)로 하천(河川)이 범람하여 침수(浸水)가 몇 일간 계속 되어 농사(農事)를 망쳤다. 그런데도 그 때는 논이 귀해 서로 경작(耕作)하려고 하였다. 벽해(碧海)가 변전(變田)으로 들판이 되었으니 이 들을 구강(龜岡)이 들이라 불렀고, 땀땀이 들 이름을 고동개 들ㆍ되박골 들ㆍ회사 들ㆍ검정 들ㆍ황새목 들ㆍ동천 들ㆍ묵실 들ㆍ깬모퉁이 들ㆍ몰구리 앞 들 등으로 불렀다. 들이 이루어지고 난 뒤 자의(自意) 타의(他意)에 의해 일본(日本)인 구강일(龜岡一)이의 시혜(施惠) 공덕비(功德碑)를 작인일동(作人一同) 명의로 동천(東泉) 탱자나무 거리에 세웠다.

당시 작인(作人)들 형편으로는 토지를 매입(買入)하지 못하고 대부분이 소작(小作)으로 논을 경작하였는데 소작료(小作料)가 너무 과도하여 추수를 해도 작인(作人)은 빈 가마니만 들고 들어 올 때도 있었다. 광복(光復) 후 구강일(龜岡一)의 비(碑)는 소작인들의 분노로 인해 무너뜨려져서 길가에 뒹굴다가 방천(防川) 막는데 들어 가 버리고 지금은 그 흔적(痕迹)이 없다.”고 한다.

 

 

 풍화루 입구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바다매립의 역사를 뒤로하고 계속가면 1002지방도를 다시 만나고 곤양면 송전리 앞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1호인 곤양향교가 서 있다. 곤양향교는 한창 수리 중이었다.


 

 

 

 명륜당 모습

 

 

 서제와 동제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곤양 향교(昆陽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1호
사천시 곤양면 송전리 349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을 받들면서 지역사회의 인재를 양성하고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전통시대의 지방교육기관이다. 곤양향교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원래 서정리에 있던 것을 1808년(순조 8)에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20세기에 들어와 형성된 것이다.
향교의 공간은 교육과 제례의 두 영역으로 나뉜다. 유생이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과 일상 생활을 하는 동.서재는 교육기능을 담당하고 공자와 저명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 및 동.서무제는 제례기능을 각각 담당하고 있다.
곤양향교의 건물배치는 교육공간을 앞쪽에 제례공간을 뒤쪽에 두는 일반적인 전학후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전형에서 상당히 벋어나 교육영역과 제례영역이 별개의 구조처럼 되어 있다. 제례영역은 향교의 주된 출입문인 풍화루를 거치지 않고 따로 출입문을 만들어 진입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는 극히 드문 예이다. 아울러 두 영역 사이에는 작은 마당이 있어 교육과 제례가 일치하는 향교의 기능을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동.서무도 대성전과 평형을 이루고 있어, 대성전의 앞에 좌우로 구성되는 일반적인 구성과는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향교의 배치와 다른 곤양향교를 구경하고 “사천 성내리 비자나무”를 보고자 언덕을 내려와 곤양면 사무소가 있는 성내리로 향했다.

 

 

 

 

 명륜당에서 풍화루를 바라보면

 

 

 

 

 

 대성전의 제례에 필요한 것들을 넣어 두는 건물

 

 

 

 단아한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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