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다솔사 어금혈봉표 이야기

천부인권 2010. 8. 26. 10:40

 

 

아름드리 낙락장송이 도열하듯 서있는 다솔사(多率寺)로 가는 길을 걷다보면 길 우측 바위에 음각으로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 광서11년 을유 구월이라 새긴 바위를 만난다. 광서(光緖)는 청나라 연호로 광서11년은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인 1885년 9월 고종재위 22년을 뜻한다. 그리고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란 임금의 명으로 다솔사 경내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금한다는 표식이다.


 

 

이곳에 어금혈봉표 암각이 새겨진 연유를 다솔사 홈페이지 도솔미디어는 이렇게 소개를 하고 있다.

 

당시 경상감사가 봉명산 다솔사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장군대좌혈인데, 이곳에 부친의 묘를 쓰면 가문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절에 사람을 보내 이장준비를 지시하면서 다솔사는 발칵 뒤집혔다.

 

이때에 수도승인 봉암스님을 중심으로 이 같은 탐관오리의 비행을 조정에 직소하기위해 승려와 신도의 연명을 받은 탄원서를 모아 상경을 결행한다. 기록에는 때마침 청나라로 향하던 조공사신행렬(일명 동지사)을 만나 그 관리에게 하소연했다고 돼 있으나, 그 시기를 고려할 때 동지사가 아니라 그해 8월 국경회담을 위해 청으로 향하던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행렬을 만난 듯하다. 참고로 동지사란 조선시대에 해마다 동지에 정기적으로 명과 청에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당시 감계사 대표는 이중하 공조참의가 맡았는데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분이었다. 후에 을미의병 거사로 많은 관리가 죽었으나 당시 관찰사였던 이중하는 백성의 존경을 받던 분이라 봉변을 당하지 않았단다.

 

한편 승려들로부터 이 같은 지방관리의 비행을 전해 듣고 즉석에서 서찰을 적어주며 이를 경상감사에게 전하라며 행렬을 돌려 군왕께 후보고 하였다는 일화다. 아마도 청으로부터 간도영역의 국경을 침탈하려는 청나라의 공세와 탐관오리의 사찰을 넘보는 행위가 같은 불의로 다가와서일까?

 

승려들은 기쁜 마음으로 문경의 한 주막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우연하게도 곤양군수로 부임해 가는 신임 목민관을 만나게 되었단다. 인사를 고하고 그간의 사정을 아뢰자 그 군수는, 서찰을 자신에게 맡길 것과 부임보고를 할 때 전하겠다는 약속을 했단다.

 

부임보고를 마친 신임 곤양군수는 다솔사의 일을 논하자, 경상감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다. 하지만 신임군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어명이요!”라고 외치며 “어금혈봉표!”라고 외쳤고, 경상감사는 무릎을 조아리고 벌벌 떨며 일어나지를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인지 거대비석에 쓰인 어금혈봉표의 표(表)가 일반적인 봉표(封標)의 표(標)와 같지 않음은 어명의 서찰을 옮겨 쓴 것이기에 그런가하고 추측해 본다.

 

“御禁 穴封 表!” 임금께서 무덤을 막을 것을 명한다는 친서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봉표는 어명의 행정적 지휘인 반면에 다솔사 봉표는 직접적 지휘서신인 셈이다. 이후로 다솔사 경내에는 어떤 분묘도 쓸 수 없었다. 따라서 '나랏님이 구한 다솔사'라는 표현이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