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다솔사 응진전과 극락전 그리고 안심료

천부인권 2010. 8. 26. 19:30

 

 

 

다솔사 주차장을 못가서 좌측에 미륵바위가 있다고 했지만 보지 못하고 계단을 오르니 대양루와 마주한다. [봉명산 다솔사 대양루(鳳冥山 多率寺 大陽樓) 2009년 11월 19일 방문 때 쓴 글] 대양루 양옆으로 적별보궁으로 가는 계단이 있어 오른쪽으로 오르니 계단 끝에 목이 날아간 거북이 놓여 있다.


 

 

다솔사의 주 불전은 대웅전이었는데, 1978년에 대웅전의 삼존불상을 개금할 때 후불탱화에서 108과의 사리가 발견되어 적별보궁으로 바꾸었다.


 

 

보통 적멸보궁에는 불단만 있고 부처가 없는 것인데 다솔사에는 누운 모습의 와불을 조각하여 둔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와불 뒤로 사리를 모셔둔 사리탑이 보여 이곳으로 갈려니 손을 씻고 가라는 안내판이 서있다. 사리탑 뒤쪽으로는 차밭이 펼쳐있다. 이 차밭은 산불이 나면 절집에 불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방어벽 구실을 할 것이다.


 

 

 

사리탑 옆에는 응진전이 있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다솔사 응진전(多率寺 應眞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9호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86

 

응진은 아라한과 같은 의미의 불교용어로 응진전은 달리 나한전으로도 불린다. 나한 또는 아라한은 부처님을 따르던 수행자들로 최고경지에 이른 스승들이며, 이곳 응진전에는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신라 선덕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처음 창건된 원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이후 1690년(숙종6)에 죽마대사가 다시 중건하였다. 그 건물도 노후화 하여 1930년 만해 한용운 선생이 다시 중수한 것이 지금 전하고 있다.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에 들보 3량으로 조성된 이익공계(二翼工系) 맞배지붕 건물로 천장은 우물천장(井)으로 마감되어 있다. 규모나 제작기법의 면에서 옆의 극락전과 거의 같아 두 건물은 같은 시기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응진전을 내려오면 적별보궁 옆을 마주보며 극락전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다솔사 극락전(多率寺 極樂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86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무량불이라고도 하며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는 대원을 품은 서방정토 세계의 부처이다.
신라 선덕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처음 건립된 이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창과 소실을 거쳐 1910년대에 중건한 것이 지금에 전하고 있다.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 좌우측의 창호와 머름, 벽체의 설치가 특이하다.

 


 

 

적멸보궁에서 내려와 좌측으로 가면 안심료(安心寮)가 나오는데, 안심료(安心寮)는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요사이지만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한국 불교의 법맥을 이은 유서 깊은 장소이다. 안심료 앞에는 측백나무 세 그루가 높다랗게 서있는데, 한용운 스님의 회갑 때 지인(知人)들과 함께 심은 것으로 ‘황금측백 나무’라고 부른다. [출처 : 달마넷]

그리고 안심료에서 김동리(1913~1995)선생이 1960~1961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등신불’을 집필하여 발표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