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김해 산해정에 가면 사람냄새 나는 남명을 만난다.

천부인권 2010. 8. 28. 11:21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737번지 돗대산 아래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25호인 산해정(山海亭)이 있다. 돗대산은 “중국 CA 소속 129편 여객기가 2002년 4월15일 중국 베이징을 출발해 김해공항에 착륙하려다 경남 김해시 삼방동 돗대산에 추락해 166명(사망 129명, 부상 37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피해자 가족들은 "조종사 과실로 사고가 났다"며 2600억원에 달하는 소송을 냈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여 알려져 있는 산이다.

출처 : [중국민항기 김해 추락사고 손배소 유족 일부승소]

 

이 돗대산의 다른 이름은 차산(次山) 또는 조차산(曺次山)이라고 한다. 산해정 뒤편의 조차산은 해발 237m의 높이로 삼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마을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이 22세에 김해 예안리 남평조씨(南平曺氏)와 결혼하여 30세에 이곳 처가마을에 정착하여 산해정을 짓고 48세가 되는 18년간 강연을 하면서 살았던 곳이다.


 

 

<출입문인 진덕문>


 

창녕조씨(昌寧曺氏)의 후손 조신의(曺臣義)가 남평조씨(南平曺氏)의 시조가 되는데, 조식(曺植)선생 역시 창녕조씨(昌寧曺氏)다. 따라서 동성동본과 혼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엄격한 혼인제도와 다른 부분이다. 요즘은 남여가 좋아하면 집안의 특별한 반대가 없으면 결혼을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집안과 집안이 만나서 혼인을 하였던 것으로 볼 때 조식선생이 혼인을 할 당시까지도 동성동본과 혼인하지 않는다는 제도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본 부인과 살면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44세가 되던 6월에 9살이던 아들 ‘차(次)’가 죽자 산해정 뒷산인 돗대산에 묻었다 하여 이 산의 이름이 조차산(曺次山) 또는 차산(次山)으로 불려지게 되었다한다.


 

 

<강당인 신산서원(산해정)>

 

조식선생도 9살밖에 되지 않은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조식선생 역시 아홉 살 때 병으로 위독한 적이 있었으나 그 고비를 극복하여 살았지만 아들 차(次)는 그렇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사랑하던 아들 차(次)가 죽자 남명은 슬픈 시를 짓기도 하고, 뒷날 조카를 매개로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靡室靡兒僧似我,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게 중과 비슷하고,
無根無我如雲.      뿌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 같도다.
送了一生無可奈,   한 평생 보내자니 어쩔 수 없는 일,
餘年回首雪紛紛    여생을 돌아보니 머리가 흰 눈처럼 어지럽도다.

 

 

 


 

<동제 서제>

 

百憂明未喪        수많은 근심에도 눈은 멀지 않았지만,
萬事寸無          만사엔 조금도 관심 없다네.
關侄一千里        생질이 천리 밖으로 떠난 지,
星霜十二          열두 성상의 세월이 흘렀구나.
還窮三月晦        궂은 장마에 석 달 동안이나 어둡고,
孤夢五更寒         외로운 꿈은 오경에 쓸쓸하구나.
方丈如毋負         방장산(方丈山)을 혹 저바리지는 않았는가?
音書亦復難         소식 전하기는 다시 어렵겠구나.

 

출처 : 집도 아들도 없는 것이 중과 비슷하고

 

 

<신산서원과 산해정 그리고 유위재, 환성재의 현판>

 

 <지숙문은 숭도사로 들어가는 내삼문이다.>

 

이곳 산해정을 안내하는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산해정(山海亭)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25호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737

 

조선시대의 저명한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이 30년 동안에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1539년(선조21)에 지역주민의 요청으로 김해부사 양사준(梁思俊)이 정자 동쪽에 서원(書院)으로 착공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중지되었다. 1609년(광해1)에 안희(安喜), 허경윤(許景胤) 등이 완공하여 나라에서 신산서원(新山書院)의 이름을 받았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철거되었다. 지금의 산해정은 1815년(순조20)에 송윤증() 등이 다시 세운 것이다. 남명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은 없고 가르치는 공간만으로 된 서원이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2칸에 추녀 끝을 올린 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앞부분의 기둥을 받치는 높은 주춧돌과 잔가지를 엮어 진흙을 바른 침실 천장의 제작방법이 특징이다.

 

 

 

 

신산서원의 맨 윗쪽에 있는 이곳 숭도사(崇道祠)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선생과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1499~1562)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송계 신계성 선생의 여표비는 밀양 후사포리에 있는데 [송계 신계성 여표비의 내력을 보면 부끄러움을 배운다.] 를 참고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