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고성 운흥사영산회괘불탱및궤(보물 제1317호)

천부인권 2010. 9. 14. 09:28

 

<사진자료 : 문화재청>

 

와룡산 향로봉 아래에 자리 잡은 고성 운흥사(雲興寺)는 일반민가와는 꽤 먼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내리니 탱화를 거는 당간지주 역할을 하는 철기둥이 서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탑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 전해지는 운흥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 6,000명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다 절반이상의 승병을 잃기도 한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수륙합동 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3번이나 이곳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대웅전 벽면에 축소판으로 있는 괘불탱의 모습>


 

이때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던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음력 3월 3짓날 영산회(천도재)를 지내 오다가, 6 25 사변 이후에 흐지부지 되었으며, 지금은 운흥사에서 주관하고 고성군수는 참석만 한다고 한다. 이때에 보물 1317호인 "영산회 괘불탱"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는 유일한 날이다. 그러나 영산회 괘불탱의 축소판이 대웅전 주불전을 처다 볼 때 왼쪽에 있어 보물을 보지 못하는 서운함을 달랠 수 있다.


 

 

 

<대웅전 뒤 벽에 걸려있는 궤>


 

괘불탱을 넣어 두는 궤는 대웅전의 뒤편 벽에 걸려있는데, 대웅전의 뒤편에 문을 달아둔 것은 이 궤를 운반하기 위해서 일 것으로 생각했다.

 

 

 

이곳 안내판에는 운흥사영산회괘불탱및궤(雲興寺靈山會掛佛幀및櫃)에 대해 이렇게 적어 두었다.

 

운흥사영산회괘불탱및궤(雲興寺靈山會掛佛幀및櫃)
보물 제1317호
경남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2

 

영산회는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비는 법회이고, 쾌불탱은 야외법회 때 펼쳐 당간지주 등에 걸어 놓는 대형불화이며, 궤는 불화를 보관하는 상자이다.
가로 768cm, 세로 1,136cm의 괘불탱에는 선 모습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여러 불상이 화면 가득히 그려졌다. 중앙 석가모니불의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고, 위에는 합장한 타방불(他方佛) 두 분을 안쪽에, 관음보살, 세지보살을 바깥쪽에 작게 그려 배치하였다. 화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그려진 석가모니불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법의를 걸쳤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모아 자연스레 내렸고, 왼손은 손바닥을 가슴 위로 올려 엄지, 중지, 약지를 살짝 구부렸다. 장대한 신체와 넓은 어깨, 두터운 법의는 석가모니불의 무게를 더하고, 어깨에 닿을 정도로 쳐진 귀는 부처의 자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쾌불탱 아래의 좌우에는 제작경위가 적힌 화기(畵記)가 있다. 화기에는 1730년 [옹정팔경술춘(雍正八庚戌春) 영조 6년]에 의겸스님(義謙比丘)이 대표(金魚)가 되어 제작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길이 806.9cm, 너비 35.3cm, 높이 30.7cm의 궤에는 만. 왕. 십. 범(卍王十梵)자 모양의 정교한 금속장식이 붙어 있다. 뚜껑 안쪽에는 괘불탱이 만들어진 1년 뒤인 1731년[옹정구년신해(雍正九年辛亥)] 3월부터 9월까지 여러 공인들이 함께 제작하였음이 먹으로 쓰여 있다.
이 궤는 당시의 금속공예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