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고성 운흥사의 문화재를 둘러보니....

천부인권 2010. 9. 17. 13:29

 

 

 

고성 운흥사는 문화재가 많이 있어 문화재 목록을 들고 하나씩 챙겨 보면서 경내를 돌아보면 나름의 재미가 솔솔한 곳이다. 보물 제1317호인 괘불탱 및 궤는 대웅전 뒤편 법당 안 벽에 궤가 걸려 있고 그 옆에는 보물의 축소판 괘불탱이 있다. 그리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인 대웅전 건물이 있으며, 유형문화재 제184호인 소장경판은 궤가 있는 벽면의 위쪽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운흥사 관음탱화’, ‘운흥사 감로탱화’, ‘운흥사 미타회탱화’, ‘운흥사 약사탱화’ 등 4점이 제355호, 제356호, 제357호, 제358호로 등록되어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는 ‘운흥사 영상전(제147호)’, ‘명부전 목조각상 21구(제288호)’, ‘목제원패 3구(제289호)’ 등이 있다.

 

 

 

 

이처럼 다량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운흥사는 세심하게 둘러보면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생활공간인 보광전과 대웅전 사이의 마당에는 오래된 장독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워 사진예술가들이 작품으로 남겨두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운흥사 대웅전(雲興寺 大雄殿)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2호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1

 

운흥사는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비교적 인적이 드문 와룡산(臥龍山) 깊은 산중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에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 6,000명을 이끌고 왜적과 싸운 곳이기도 하다. 이때 왜적에 의해 불탄 것을 1651년(효종 2)에 다시 세웠으며 대운전은 1731년(영조 7)에 재건되었다. 대웅전 앞에 누각이나 탑이 없는 점이 특이하다. 아마 임진란 때 불탄 부속건물들을 미처 복원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크기에 비해 기둥이 대단히 높아 건물이 실제보다 더 커 보인다. 기둥은 민흘림과 배흘림이 섞여 있는데, 배흘림기둥은 굵기나 곡선의 비율이 안정되어 있어 아름답다. 건물의 장식은 단순하게 처리 했지만 장식물의 간격이 일정하고 기둥과도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내부의 모습은 외부에 비해 훨씬 화려한데, 중앙을 위해 피어오르듯 처리한 장식은 미려함을 더해준다. 천장은 층급(層級)을 두고 중앙을 높게 처리함으로써 거대한 공간감을 느끼게 하였다. 부처가 거처한다는 수미단(須彌壇)을 상징하는 불단 위에는 닫집을 씌움으로써 신성성(神聖性)을 더해주고 있다. 마루 털을 짜고 그사이에 넓은 널을 짤게 잘라 끼운 우물마루는 소박하면서도 고급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대웅전은 조선 후기 다포계 맞배집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운흥사 소장경판에 대해서는 문화재청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운흥사 소장경판(雲興寺 所藏經板)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84호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1

 

경남 고성군에 있는 운흥사는 모두 16종 194판의 불교관련 문헌 목판을 소장하고 있다. 이 목판들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새겨진 것들로 대승경전과 불교의식관련 문헌들이다.
이 가운데 정토신앙의 근본경전인 아미타경은 세조 10년(1464)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것을 숙종 28년(1702)에 다시 그대로 새겨 간행한 복간본이다. 거의 대부분의 판들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 조선 후기 절의 목판인쇄문화와 운흥사의 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사진자료> 

 

고성운흥사관음탱화(固城雲興寺觀音幀畵)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55호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1

 

중생들을 고난으로부터 구제하여 자비로써 돌봐주는 관세음보살을 단독으로 그린 그림이다.
머리에 화불이 그려진 화려한 보관을 쓴 관세음보살은 정면을 향하여 앉아 있고, 오른손은 무릎 뒤로 살짝 감추고 왼손은 왼 무릎위에 올려놓았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무릎 아래쪽까지 내려져 있고 가슴부분은 구슬장식으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모습이다. 관세음보살의 머리와 몸 뒤로는 둥근 광채(두광·신광)가 표현되었으며, 특히 쉬고 있는 듯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보살의 발 모양이 매우 흥미롭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롭고 온화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문화재청 사진자료> 

 

운흥사 감로탱화(固城雲興寺甘露幀畵)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56호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1

 

효(孝) 사상과 결합하여 크게 성행한 감로탱화는 조상의 극락왕생을 위해 그린 불교그림으로, 부처를 극진히 대접하여 조상의 영혼이 지옥세계로부터 구제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은 크게 세부분으로 표현되었다. 그림의 맨 윗부분에는 불·보살의 모습이 표현되었고, 중간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놓은 성반(盛飯)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먹지 못해 고통 받는 아귀왕과 함께 지옥장면, 싸우는 모습, 형틀에 묶여있는 모습, 광대패놀이, 호랑이에게 쫓기는 모습 등등 인간이 그 업보에 따라 겪게 되는 갖가지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문화재청 사진자료> 

 

운흥사 미타회탱화(固8城雲興寺彌陀會幀畵)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57호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1

 

서방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부처를 묘사한 탱화로, 화면 가운데 주불인 아미타부처를 크게 배치하였다. 아미타불은 양어깨를 모두 덮고 있는 옷을 입고, 오른발을 왼무릎에 얹고 있는 길상좌(吉祥坐) 모습이다. 그림의 맨 위부분에는 아미타부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여러 성중(聖衆)의 무리가 표현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는 흰옷(白衣)을 걸친 관세음보살을 위시한 아미타 8대 보살과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있다.

 

 

 

<문화재청 사진자료> 

 

고성운흥사약사탱화(固城雲興寺藥師幀畵)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58호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1

 

중생을 모든 병의 고통에서 구하고 치유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한다는 약사부처를 그림으로 그린 탱화이다.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약사부처를 가운데에 크게 배치하고, 약사부처 주위로는 맨 윗부분에 팔부신중을, 그 아래로는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쓴 보살들을 그렸다. 그리고 화면의 맨 아래 부분에는 좌우로 각각 2분씩 불법을 지키는 사천왕상이 배치되어 있다. 연꽃대좌에 앉아 있는 약사부처는 양 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오른 발을 왼무릎에 올려놓은 길상좌(吉祥坐)의 자세로 큼직한 키 모양 광배를 갖추고 있다.

 

 

안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운흥사 영산전(雲興寺靈山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7호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1

 

운흥사는 의상대사가 676년에 창건한 사찰로서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지휘한 승병(僧兵)의 거점 사찰이기도 했다. 사찰의 건물은 임진왜란 중에 대부분 소진되었으며, 지금 전하는 영산전은 1731년(영조 7)에 중건된 것이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에 들보 5량으로 조성된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천장은 가운데를 높이고 하나의 우물천장을 조성하였으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정면 가운데 칸은 좌우 협칸보다 넓게 만들어 쌍여닫이 빗살창과 띠살창을 달아 대칭적이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 산화한 승병과 의병의 명복을 비는 영산재를 이 곳에서 매년 거행하고 있다.

 

 

고성운흥사명부전목조각상(固城雲興寺冥府殿木彫刻像)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8호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1

 

 
운흥사의 명부전 안에 있는 목조각상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비롯하여 시왕 등이다. 도명존자는 지옥보살의 지팡이를 들고 있고 무독귀왕은 문관차림이다. 시왕은 삼존의 양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그 사이사이로 사자, 판관, 동자상 등이 있다. 명부전의 입구에는 인왕상이 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이 목조각상들은 불교미술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고성운흥사목제원패(固城雲興寺木製願牌)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9호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1

 

운흥사 원패는 왕실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기원패로서 왕의 패, 왕비의 패, 세자의 패 모두 3점이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왕의 패에는 황룡을 새기고 왕비의 패에는 봉황과 구름무늬를 새겼으며, 세자의 패에는 용과 새의 무늬를 새겨 놓았다. 섬세한 조각이나 정교한 문양을 새긴 기법과 장식적인 면에서 조선 후기 불교예술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