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김해 취정재에 보관된 허성재선생 철명편목판을 보다.

천부인권 2010. 8. 29. 12:21

 

 

 김해향교를 찾았다가 그 앞쪽에 있는 취정재로 가보았다 취정재(就正齋)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4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허성재선생 철명편목판(許性齋先生 哲命篇木板)’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허전선생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이로(以老), 호는 성재(性齋)이다. 선생은 퇴계 이황-한강 정구-미수 허목-성호 이익-순암 안정복-하려 황덕길로 이어지는 기호남인(畿湖南人)의 학맥을 계승한 분이다.
1864년 3월 김해에 부사로 부임하여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불과하지만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 단계 김인섭(金隣燮),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삼원당(三元堂) 허원식 등 지역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학맥을 전하였다.
 

 

선생은 김해부사로 부임하자 곧바로 백성들을 보살피며 안으로는 관리들을 결속하고, 법에 따라 엄격하게 다스릴 것을 내용으로 하는 회유문(回諭文)을 반포하였다.
또한 80세 이상 된 노인들을 위문하여 쌀과 고기를 내림으로써 민심을 모았으며 향약을 새롭게 하여 향교 벽에 게시하고 약장(約長)을 뽑아 매월 조문을 읽고 상벌을 내리게 하여 심한 자는 관가에서 다스리게 했다한다.

 

 

1866년 2월에는 신산서원(新山書院)의 원장이 되어 남명선생이 학문을 수양했던 산해정을 찾아 문도들과 강학을 했고, 4월에는 휴가를 얻어 경상도내 여러 사당과 서원을 방문했는데 이르는 곳 마다 50~60명의 문도들이 모여 강학을 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5월에는 노필연 조응규 등을 비롯한 70여명의 문도들과 함께 함안의 합강정(合江亭)에 모여 유람을 하고 그때 지은 시를 모아 ‘용화동주록(龍華同舟錄)’을 남겼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로 인해 “김해부사의 직무는 보지 않고 놀러만 다닌다.”는 상소가 조정에 올라가자 그의 제자와 유생들이 그의 업적을 논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출처 : 한강학파 성재(性齋) 허전[許傳] 선생(1)

 

 

그의 제자들은 허전선생의 학덕을 남기려고 박치복 등이 중심이 되어 산청에서 성재문집을 간행했으며, 1927년 김해에서는 취정재(就正齋)를 건립하고 영정각을 세워 김해 백성들에게 끼친 공을 기리고자 했다.

 

 

이곳 장판각 앞에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허성재선생 철명편목판(許性齋先生 哲命篇木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4호
김해시 대성동 248

 

조선 후기의 학자 성재(性齋) 허전(許傳 1797~1886)선생의 저서 철명편(哲命篇)을 인쇄한 목판. 허전은 황덕길(黃德吉)의 문인으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학맥을 이은 기호남인 학자로 당대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었다. 선생은 1864년(고종 원년)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2년간 재직하면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향약(鄕約)을 강론하여 유도(儒道)를 크게 진작시켰다. 이 책판은 중국 고대의 삼왕에서 우리나라 역대 제왕에 이르기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책인 철명편의 목판이다. 57장으로 30.2×19.2cm의 크기이다. 1890년 조판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잦은 인쇄로 말미암아 마구리가 떨어져 나가고 목판만 남아있다.

 

 

장판각 밖은 한옥의 구조를 하고 있지만 안쪽엔 도난을 우려하여 강철책이 설치 되어 있다. 이곳에 보관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박물관에 보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나름의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