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세종대왕과 단종 태실지에 가면 조선의 역적을 만난다.

천부인권 2010. 8. 31. 06:00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가면 세종대왕 태실지와 단종의 태실지를 볼 수가 있다. 먼저 세종대왕 태실지로 들어가 보면 자동차 한대 다닐 수 있는 길 옆 산기슭에 부셔진 석물들을 모아둔 파괴된 세종대왕의 태실지를 보게 된다. 물론 태실지의 위치도 그 자리가 아니라 산봉우리에 있어야 하지만 본 태실지 자리에는 다른 묘가 자리하고 있어 태실지를 복원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조선왕조의 태실지는 길지라고 알려져 있어 조선을 강제점령한 일제가 모조리 파괴하고 그 자리에 또다시 복원되지 못하도록 민간에 팔아 버렸다한다. 그러면 이러한 길지를 일제에게 살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이겠는가? 조선에 충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태실지를 왜놈들이 팔았겠는가? 아니면 일제에 충성하여 조선을 망치는 역적들에게 팔았겠는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조선을 배반하고 민족의 정기를 팔아먹는 역적들만이 살수 있는 땅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실의 땅을 일제가 자기 것처럼 팔아먹는 행위도 잘못이지만 그것을 사들여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서 이 터가 일제(日帝)가 도둑질한 작물인지 알면서도 사들이고 그곳에 자신의 묘 자리로 사용하는 해괴한 짓거리를 하는 역적들이 아직도 건재한 것은 대한민국은 조선의 역적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은 아닐까?


 

 

일제는 멸망한 조선왕조의 무덤은 집중 관리해야 한다며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장을 하여 공동무덤으로 만들어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낮추고자 계획적으로 파괴를 일삼았다. 서삼릉(西三陵)은 사적 제200호로 중종 계비(中宗 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희릉(禧陵), 인종(仁宗)과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의 효릉(孝陵), 철종(哲宗)과 철인장왕후(哲仁章王后) 예릉(睿陵)을 합쳐 ‘서삼릉’으로 부른다. 경내에는 3원(園)과 46묘(墓), 태실 54기(基)가 있다.

 

  

세종대왕 태실지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사천 세종대왕 태실지(泗川 世宗大王 胎室地)
경상남도 기념물 제30호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27

 

이곳에는 조선 제4대왕인 세종(世宗 1418~1450재위)의 태가 봉안되어 있었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에게 생명을 준 것이라 하여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특히 조선 왕실은 국운(國運)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태을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다. 조선 정부로 새로 태어난 왕실 자식들의 태를 묻기 위해 특별히 태실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이 기구에서는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한 다음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그것을 묻게 하였다.


세종대왕의 태는 이러한 절차에 따라 왕위에 오른 해인 1418년에 이곳에 봉안 되었다.그러나 이 태 무덤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조정은 1601년(선조34)에 대대적으로 이곳을 수리하였고, 1734년(영조10)에 다시 비석을 세우면서 정비하였다. 그러나 왕실의 태실이 길지에 있다는 것을 안 일제는 1929년에 조선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에 산재한 왕실의 모든 태실을 경기도 양주로 옮기고, 태실이 있던 땅을 모두 민가에 팔아버렸다. 이곳에 있던 세종대왕의 태실도 이때 양주로 옮겨갔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서 있다. 다만 영조 때 세운 비석과 주변에 흩어진 석조물에 의해 이곳이 세종대왕의 태실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세종대왕의 태실지를 지나 안쪽으로 가면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의 사진모습과 태실지 안내판과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꽤 너른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세종대왕 태실지에서 직선거리로 300m 앞쪽에 있는 단종태실지로 가기 위해 되돌아 나와 우회전을 하여 650m여를 가면 좌측 편 논 가운데 소나무로 우거진 동그란 동산 같은 곳이 보인다. 이곳이 비운의 왕 단종(端宗) 태실지인데, 원래는 산줄기가 이 동산까지 이어진 길지였지만 일제가 조선왕가의 맥을 끊기 위해 산줄기를 없애고 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단종태실지에 들어서 있는 무덤은 1990년 말 묘의 후손들이 비를 세워 그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알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선의 역적 최연국(1885~1951)의 묘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석에 보면, 최연국의 아들은 경기도지사와 국회의원 등을 지내고, 사위는 검사를 지냈으며, 조카는 국회의원과 KBS 사장, 문화공보부 차관 등을 지냈다고 기록해 놓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최연국을 친일파로 일제시대 때 경남평의원과 조선전람회 평의원, (중주원) 칙임 참의 등을 지내고, 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단종태실지(端宗胎室地)
경상남도 기념물 제31호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438

 

이곳은 조선 제6대왕인 단종(端宗 1452~1455)의 태(胎)를 보관했던 곳이다. 단종의 태실은 1441년(세종 23)에 단종이 태어나자 세종대왕이 자신의 태실 앞쪽에 손자의 태실을 만들어 태를 안치하면서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 태실은 할아버지인 세종의 태실에 비해 규묘를 작게 만들었다. 정유재란(1597) 때 왜구들이 세종의 태실을 크게 훼손하였는데, 이때 단종의 태실은 화를 면하였다. 이후 1734년(영조 10)에 조정에서 세종의 태실비(胎室碑)를 세울 때 단종의 태실비도 같이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태실이 길지(吉地)에 있다는 것을 안 일제(日帝)는 1929년 조선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에 산재한 조선왕실의 모든 태실을 경기도 양주(揚州)로 옮기고, 태실이 있던 땅도 민간에 모두 팔아 버렸다. 이때 단종의 태실도 양주로 옮겨졌으며, 태실이 있던 땅도 민간에 팔려졌다. 지금은 태실이 있던 자리에 민간인의 묘가 들어서 있다. 다만 주변에 흩어진 비석과 조형물들을 통해 이곳이 단종의 태실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