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창원시에 산재한 열녀비 이야기

천부인권 2010. 10. 13. 10:03

 

 

요즘 우리사회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아져 우려가 되지만 죽음을 선택해야만 하는 그들의 사연은 오죽하겠는가? 웃음전도사 최윤희씨 부부의 동반 자살을 뉴스에 접하면서 조선시대에는 부부의 동반 자살을 어떻게 보았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창원시에 산재해 있는 남편의 죽음과 함께한 열녀비를 찾아보았다.

 

 


유당(攸堂) 김종하(金鍾河)선생이 쓴 「창원군지」 74P, 열부(烈婦) 및 효부(孝婦)편에는 창원시 성산구 안민로184번길 3의 작은 소로 옆 안민고개의 구릉 끝자락에 세운 열부비(烈婦碑) 2기에 관한 기록이 있다.
첫째, 박익천(朴翊天)의 처 배씨(裵氏)는 부남 안민인(府南 安民人)으로 구고(舅姑 :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모시기에 지성(至誠)으로 하였으며, 그 부(夫 : 남편)가 사망(死亡)한 후에 자액(自縊 : 스스로 목을 매어 사망함)하였다. 사문(事聞 : 그 사실이 보고 되자.)이 되어 정려(旌閭)를 명(命)하였다.
둘째, 박경천(朴擎天)의 처 분성배씨(盆城裵氏)로 품성(稟性)이 정숙(貞淑)하여 시모(媤母)를 효(孝)로서 봉양(奉養)하고, 그 부(夫 : 남편)가 기병(奇病)을 얻어 신금(呻昑)하는 중 배씨가 축천원대(祝天願代)하였으나 효력 없이 사망하였다. 그날 밤 배씨가 사체(死體)를 안고 순사(殉死)하여 순조(純祖) 을축(乙丑 1805)에 예조(禮曹)에서 입안복호(立案復戶)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창원 천선동 분성배씨열녀비(昌原 遷善洞 盆城裵氏烈女碑)
창원시 성산구 천선동 1184
조선 충효비

 

안민동의 성주사역을 지나 철로 남쪽에 인접한 소로를 따라 100m쯤 가다보면 도로변에 ‘학생 박경천처 분성 배씨지각’(學生 朴擎天妻 盆城 裵氏之閣)이 세워져 있다.
배씨는 박경천의 처이며 마음이 정숙하여 시모(媤母)를 효로써 봉양하였고, 남편 박경천이 병을 얻자 정성을 다해 간병을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자 그날 밤 남편의 시신을 안고 순절(殉節)하였다. 순조(純祖) 을축(乙丑 1805)에 입안복중(立案復中) 하였다.
이곳은 계곡상의 평지에 해당하며 비각은 총높이 154cm, 비석높이 91cm, 너비 37cm, 폭 21cm이다.
이 비석의 기단 부는 가로 60cm, 세로 30cm정도 크기이며, 약 34개 정도의 성혈이 있다. 성혈은 큰 것이 10☓7cm, 중간 것은 7☓5cm, 작은 것은 5☓3cm 정도이다. 성혈을 일명 알바위라고 하는데, 기자신앙에 입각하여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면서 돌로 문질러 생겨난 홈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2005년 창원시 문화유적분포지도 (창원대학교 박물관) 

 

 

 

 

 

 

창원 사파정동 열부김씨지려(昌原 沙巴丁洞 烈婦金氏之閭)
창원시 사파정동 99-11
조선 충효비

 

사파 동성아파트에서 삼익아파트로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삼거리에는 김녕김씨 재실이 있다. 그 재실 맞은편에는 버스정류소가 있는데, 버스정류소 바로 위쪽 산자락 입구에 비석이 있다.
석제 비각과 현판석, 열부김씨사실비(烈婦金氏事實碑), 대석(臺石)으로 구성된 비이다. 비의 앞 양쪽에 문인석이 세워져 있고, 비의 전면 중앙에 설치된 성혈석은 마치 무덤의 상석이나 향로석을 갖추듯 박아놓았는데, 지름 9cm, 깊이 7cm에 이르는 커다란 성혈(性穴)을 새겼다. 지붕돌은 모임지붕 형태이며, 용마루와 기왓골을 새겼다. 지붕돌은 양쪽의 활주형 돌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데, 왼쪽은 화강암이고 오른쪽은 역암(礫岩)으로 석질이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다. 현판석은 화강암제의 장방형 판장석(板狀石)이며, 열부고사인박정희 처김해김씨지려 상원 무오 이월 일 수정(烈婦故士人朴正熙 妻金海金氏之閭 上元 戊午 二月 日 修旌)이라 새겼다. 비대석은 3매의 화강암을 세로로 설치하였다. 전체 높이는 147cm, 지붕돌 높이 28cm, 가로 134cm, 세로 96cm, 기둥 높이 119cm, 너비 47cm, 두께 14cm, 현판석 가로 76cm, 세로 25cm이다.

 

출처 :2005년 창원시 문화유적분포지도 (창원대학교 박물관)  

 

 김종하씨가 쓴 창원군지에는 '창원 사파정동 열부김씨지려(昌原 沙巴丁洞 烈婦金氏之閭)는 박문동(朴文童)의 처(妻) 부내죽계인(府內竹界人)이다.  구고(舅姑)을 성효(誠孝)로서 받들었고 그 부(夫)의 사후(死後)인 삼일(三日)에 자액(自縊)하였다. 사문(事聞)되어 정려(旌閭)를 명(命)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원군지의 기록이 옳은 것이라 다시 쓴 것이다.

 

 

 

 

창원 토월동 열부김씨지려(昌原 吐月洞 烈婦金氏之閭)
창원시 토월동 129
조선 충효비

 

황성표(黃成表)의 처 김녕김씨(金寧金氏)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로서 본래 창원시 상남면 외동에 있던 것을 이곳 창원황씨 재실 고산정 뒤쪽에 옮겨와 새워 두었다.
석재비각과 정려판(旌閭板), 비, 비대(碑臺)로 구성되어 있는 정려각의 지붕돌은 모임지붕 형태이며, 용마루와 기와 등 골을 새겼다. 비각의 지붕돌은 양 활주에 의해 지탱되었으며, 비각 내에는 현판석과 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갈형(碑碣形)의 모습이다. 재질은 역암(礫岩)이며 비를 받치고 있는 비대석은 화강암재로 연꽃문양을 새겼다. 정려에 새긴 간지(干支)로 보아 고종 29년 임진(1892년 壬辰)에 정려를 받아 을미년(乙未年)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에는 ‘열부 증동몽교관조봉대부회산황공성표처령인김녕김씨지려 상지이십구년임진삼월십이일 명정(烈婦 贈童蒙敎官朝奉大夫檜山黃公成表妻令人金寧金氏之閭 上之二十九年壬辰三月十二日 命旌)’이라 적었다.
전체 높이 193cm, 지붕돌 가로 147cm, 세로 95cm, 높이 28cm, 기둥 높이 105cm,  너비 51cm, 두께 18cm, 현판석 가로 92cm, 높이 40cm, 두께 7cm, 비신 높이 105cm, 너비 42cm, 두께 15cm, 비대 가로 49cm, 세로 42cm, 배례석 가로 77cm, 세로 47cm,이다.

 

출처 :2005년 창원시 문화유적분포지도 (창원대학교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