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교사리 삼존석불의 어제와 오늘

천부인권 2010. 10. 16. 06:30

 

 

<석불암 입구인 해탈문의 모습>

 

 

 <건장한 금강역사>

 

 

<연화문 광배>

 

 

<본전불을 모신 극락전>

 

 

 <극락전에 모셔진 약사여래입상>

 

 

<아미타여래좌상>

 

 

 <문화재청 사진자료 : 현재 복구된 모습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교사리 삼존석불(校社里三尊石佛)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22호
고성군 고성읍 교사리 301-4

 

이 삼존석불은 2기의 서있는 불상(立像)과 1기의 앉아있는 불상(坐像)으로 구성 되어있다. 현재 위치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42년에 유보성화상(柳普城和尙)이 암자(石佛庵)를 짓고 다시 모셨다. 세 불상 모두 머리와 손, 발 등이 훼손 되어 있는 것을 복구하여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고 예전에는 석고로 복구했다가 현재에는 다시 화강암재로 복구하여 두었다.


주지스님에 의하면 이렇게 불상을 훼손한 것은 조선시대 유생들이 불교를 배척하면서 훼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씀하셨다. 교사리라는 지명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곳에서 불과 100m여에 고성향교가 자리하고 있어 훼손의 정도가 심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문화재청이나 백과사전에는 이곳 안내판에서 설명하고 있는 3기의 석불 사진이 있지만 현재에는 석고를 없애고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구해 두었다. 이곳 석불암은 해탈문(解脫門)을 지나면 마당이 나오고 해탈문과 마주보고 본존불을 모시고 있는 극락전이 있다. 해탈문안에 들어서면 좌측에 팔·다리의 근육이 발달하였고, 사나운 표정을 한 신체 건장한 금강역사가 서있고, 맞은편에는 연화문양의 광배가 모셔져 있다. 삼존석불 중 서있는 1기의 석불이 이 금강역사이다.


극락전(極樂殿)에는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가 중앙에 본존불(本尊佛)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오른쪽(앞에서 볼 때 왼쪽)에는 손에 구슬을 든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서있다. 아미타여래는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친 채 가부좌를 틀었고 양손바닥은 무릎을 짚고 앉아있다. 지옥의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하는 지장보살은 두건을 두른 민머리로 복구하였다. 이곳의 삼존석불은 고려시대의 석불로 추정하고 있다.

 

예전의 문화재청 사진과 현재 복구된 모습을 비교해 보면 문화재 복구에 대한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