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경남 기념물 제19호 남해 대국산성을 보다.

천부인권 2010. 11. 15. 17:00

 

 

 <남해 대국산성 모습>


 

마창기술봉사단을 따라간 남해 북남치마을에서 유명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저 산위에 ‘대국산성’이 있다고 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물으니 북남치마을에서 대국산으로 가는 임도가 있으니 차를 타고 올라가면 마지막 주차할 곳에서 얼마지 않아 대국산성이 나온다고 말씀을 하신다. 어느 정도 일거리도 줄어들어 대국산성이 있다는 임도로 차를 몰았다. 생각보다 시멘트길이 잘 닦여있어 대국산성 입구 50m여까지 접근한 후 주차를 하고 언덕을 오르니 새롭게 정비한 대국산성이 나타난다.


 

 

<남해 고현면 남치마을 전경, 동.북남치마을>

 

 

<대국산성 입구>

 

 

<대국산성 입구에서 되돌아 본 풍경>

 

 

 <대국산성의 동남방향 모습>

 

 

 

<산성 안에 있는 물모으는 연못>


 

대국산성 안에는 오랫동안 전투를 할 수 있도록 식수를 가두어 두는 웅덩이가 새롭게 정비되어 있었고 우물위에는 전망대를 새운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이 놓여져 있었다. 이곳에서 설천면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왜구의 잣은 침입을 받은 남해로서는 이렇게 산성을 쌓아 자체적으로 전투를 할 수 밖에 없는 당시 섬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보는 것 같다.


 

 

<전망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주춧돌들, 좌측의 산이 금음산>

 

 

<성의 동쪽방향 풍경 설천면 갯마을이 한 눈에 들어 온다.>


 

현재의 산성은 새롭게 정비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작은 돌멩이는 그냥 두고 장비를 사용하여 건설하다보니 인력으로 하는 것보다 큰 돌들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성곽의 돌들은 다양한 잡석을 사용하여 밖을 직각으로 쌓고 그 안에 돌을 채우고 흙을 넣어다진 성곽임을 안내판에는 설명하고 있다.


 

 

<산성에서 바라본 북남치마을 풍경>


 

대국산성 위에서 북남치마을을 바라보니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골마을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바닷가 갯마을들이 예쁘게 보인다.


 

 

<동쪽사면의 풍경>

 

대국산성의 동쪽사면에는 구지뽕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옛날에도 사람들이 함부로 오르내리지 못했던 요충지 일 것으로 생각했다. 산성의 아래쪽을 보면 조선시대 성곽을 쌓는 기법들이 그대로 보인다. 그리고 요즘 위쪽에 건설한 산성의 기법은 그때보다 많이 정교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흩어져 있는 파편들>

 

 

산성 주위에는 도자기나 옹기, 기와파편이 흩어져 있어 이것들을 잘 살펴보면 이 대국산성이 언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어느 시대를 거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웅장한 산성의 모습>

 

 

<정교한 옛 산성의 흔적>

 

 

이곳 대국산성 안내판에는 이 성의 전설과 함께 산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국산성(大局山城)
경상남도 기념물 제19호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진목리 산18-4

 

이 성은 설천면 진목리와 비란리, 그리고 고현면 남치리에 걸쳐있는 해발 378m의 대국산 정상에 돌로 쌓은 성이다. 둘레는 약 1.5km이고, 높이는 5~6m, 폭 2.4m이다. 성안에는 연못 터와 건물을 세웠던 주춧돌이 있고, 돌로 쌓은 네모진 경계초소가 있어 멀리 바다를 감시하던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안팎을 쌓고 그 중간에는 흙을 채워 넣었다. 성문은 동남쪽과 북쪽 두 곳에 있었는데, 동남쪽의 것이 정문으로 여겨진다. 성의 보존상태는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으로 북쪽 일부만 훼손되었다.


이 성의 축조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약 500년 전에 비라리에 의좋은 형제가 살았는데, 한 처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내기를 하였다. 처녀가 하루 저녁 두루마기를 만들 동안, 형은 100kg이 넘는 쇠고랑을 찬 채 16km 떨어진 읍내까지 갔다 오고, 동생은 대국산에 성을 쌓는 일이었다. 처녀가 두루마기를 다 만들었을 때, 동생은 이미 성을 완성한데 반해 형은 제시간 내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다. 이후 동생은 형의 죽음을 원통해 하면서도 이 산성을 이용해 밀려오는 왜구를 막아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조선 경종(景宗, 1721~1724 재위) 때 천장군(千將軍)이 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성안에서 출토된 토기조각, 자기, 기와 조각 등으로 보건대 이 성은 삼국시대에 만들어 졌으며 조선시대에 왜구를 막는데 이용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