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병자호란의 치욕에도 빛난 창원인의 충절-황시헌

천부인권 2010. 11. 23. 06:37

 

 

창원부읍지(昌原府邑誌 : 1832) 본조(本朝)에 보면 “백선남(白善男), 병자(丙子) 2월에 부임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쌍령(雙嶺)에 나아가 진을 치고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그때 부사를 수행하던 아전 황시헌(黃是憲)이 인신(印信)을 메고서 같이 죽었다. 청렴결백하여 비가 세워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백선남의 비는 경남대학에 있다가 현재 용호동 용지공원 비석군 4번째에 세워져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비의 앞면에 이렇게 적고 있다.


 

 

대도호부사백후선남청정비(大都護府使白侯善男淸政碑)

於戱我使 可泯其跡    어희아사  가민기적
政淸留犢 志甘果革    정청류독  지감과혁
民懷其惠 士哀其死    민회기혜  사애기사
短碣一片 遺愛千禩    단갈일편  유애천사
丁丑十月  日           정축 10월  일

 

어허 ! 우리 사또 그 훌륭한 자취가 희미해질 수도 있겠구나.
정사는 맑아 미물에 까지 미쳤고, 그 뜻이 좋다면 과감히 혁신(革新)했다.
백성은 그 은혜를 되새기고, 선비들은 그 죽음을 슬퍼하노라.
작은 비석 하나이지만 ,  아름다운 그 자취는 천년을 가리라.

 

 

 

<위 사진은 팔용동 벽산아파트에서 촬영한 것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집 배란다로 안내해 주시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이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창원부읍지(昌原府邑誌) 충신(忠臣) 편을 보면 “황시헌(黃是憲), 창원도호부 안의 정계(井界 : 현 동정동) 사람이다. 병자란(丙子亂 : 1636) 때 부쉬(府倅 : 창원도호부사)를 따라 적과 싸우러 나가 죽어 절개를 지켰다. 포상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추증하고 정려(旌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김종하씨가 쓴 창원군지(昌原郡誌 : 1994) 충신(忠臣) 편에도 “부내정계(府內井界)인이다. 인조병자란(仁祖丙子亂)에 창원부사백선남(昌原府使白侯善)이 부병(府兵)을 인솔(引率)하고, 성야부난(星夜赴難)할 때에 황시헌은 그때 부사로서 백선남을 수종(隨從)하였다. 광주쌍령(廣州雙嶺)에서 적을 만나 역전(力戰)하다가 백선남은 장렬한 전사를 하였고, 막리(幕吏)는 관인(官印)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시헌은 관인을 수습(收拾)하고 적과 용전하여 순절하였다.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례각과 충절각 묘소가 보이는 벽산아파트에서 촬영한 사진>

 

 

백선남을 보좌하고 전투에 나선 황시헌(1606~1636)은 자가 도부(道夫)이고,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병자호란 당시 평민이었던 황시헌은 배리(陪吏)의 신분으로 인조를 구하러 남한산성으로 가던 중 경기도 광주의 쌍령전투에 참가하여 사력을 다하였지만 창원부사 백선남도 전사하고 장수들도 도망을 가는데, 창원부의 관인이 땅에 떨어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잡으려는 순간 적의 칼에 한 팔이 잘렸다. 남은 손으로 관인을 잡으려 할 때 그 팔도 잘리자 입으로 물고 관인을 수습하려하자 적이 목을 쳤다고 한다. 이 관경을 쌍령전투에 함께 참가했던 군노(軍奴)가 보고 창원부에 고하였는데, 군노가 황시헌의 죽음을 재현하여 보여준 모습을 보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오늘날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문창제놀이’가 되었다.


 

 

<제례각과 관리사>

 

 

<충절각과 황시헌공 묘>

 

 

 

 

 

 

<황시헌공 묘와 그 후손들의 선산>

 

 

<황시헌공의 묘>


 

황시헌의 묘지가 마산 완월동 뒷산에 있던 것을 창원남산의 양지바른 곳에 이장해 두었다. 황시헌의 묘지 앞에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제사공간인 전통목조기와 건물이 있는데, 고향의 봄 도서관을 가다보면 입구 좌측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 그것이다. 이곳 현판에는 ‘충신공조정랑황시헌공(忠臣工曹正郞黃是憲公) 제례각(祭禮閣)’이라 쓰여 있다. 그 위쪽에 충절각(忠節閣)이 있으며, 충절각 안에는 ‘충신창원황공시헌지비(忠臣昌原黃公是憲之碑)’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 비각 위에 이장해온 황시헌공의 묘소가 있어 그의 정신을 기릴 수 있다.


 

 

<묘소 위에서 바라본 모습>


 

하필이면 이러한 충신의 묘소 옆에 조선의 역적 친일파 이원수를 기리는 “고향의 봄”이라는 도서관을 세운 것은 창원시가 황시헌공의 충절을 욕보인 것이다. 차라리 이름을 “창원의 얼 도서관”으로 개명하는 것이 창원인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