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거가대교 따라 찾아본 이순신과 원균의 이야기

천부인권 2010. 12. 21. 17:05

 

 

<유호리 전망대에서 바라 본 거가대교>


거가대로를 자가용 차량으로 간다면 가는 길에 일단 휴게소를 들러 주변 풍경을 구경하고 거제도를 향해 가면 해저 침매터널을 지나고 중죽도와 저도를 잇는 첫 번째 대교를 지나게 된다. 그리고 저도의 일부를 지나는 길이 끝나면 또 다시 두 번째 대교의 교각을 만나게 된다. 이곳 저도는 행정구역이 창원시 진해구에 속하며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대통령 여름 휴양지로 사용해 왔으나 지금은 해군이 관리하는 군사시설로 인식되고 있다. 저도를 지나 두 번째의 대교를 통과하면 거제시 장목면이다.


 

 

<농소몽돌 해변의 모습>

 

거가대로를 계속가다 첫 번째 인터체인지에서 내리면 58번 국도를 만나는데 여기서 좌회전을 하여 계속 가면 농소몽돌 해변을 만나게 된다. 거제 학동의 몽돌해변 못지않은 규모와 아름다운 해안선을 가지고 있지만 거가대교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던 해변이다. 그 만큼 장목면은 거제에서도 외진 곳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잠시 해변의 몽돌 구르는 소리를 듣는 것도 좋을 것이다.

 


 

<유호리 전망대 인근에서 바라 본 거가대교>

 

계속 58번 도로를 따라 가면 농소고개를 지나는데, 거가대로와 인접하여 스친다. 고개 마루에 도착하면 유호리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 일대는 거가대교와 일출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하유마을에서 거가대교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은 사진을 찍는 분들에게는 인기 있는 곳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유호리 전망대 인근에서 바라 본 거가대교>

 

 

<구영등성(舊永登城) 입구의 모습>


거가대교의 일출과 야경을 보고 길을 따라 가다보면 언덕길을 만나고 그 길을 내려오다 만나는 마을이 구영마을 이다. 이곳 구영마을 뒤편에 있는 구영교회에 가면 경상남도 기념물 제205호인 ‘구영등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구영등성은 거제의 북쪽지역으로 진해와 마주보는 해로의 요충지라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1490년(성종 21)에 쌓았던 성이다. 인근의 구율포성과 함께 왜구의 출현을 장목진 객사로 전하는 임무를 담당했을 것이다.


 

 

<구영교회는 구영등성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구영등성의 성곽 모습>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구영등성(舊永登城)
경상남도 기념물 제205호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1249외


이 성은 1490년(성종21)에 왜구(倭寇)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다. 이후 왜구의 침략을 받아 성이 크게 훼손된 것을 임진왜란 때 다시 수리하였다. 그 후 1623년(인조 원년)에 지금의 영등(永登)으로 군진을 옮기면서 구영등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터는 해안에 위치한 구영마을 남쪽의 야산 기슭 평면에 원추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고 겨우 받침대부분(基壇部)만 남아 있지만 성의 구조와 쌓는 방법 등은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남북 양쪽에 반원형의 성문이 있고 성문 위에는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낮은 담(성가퀴)이 설치되어 있다. 성문의 입구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성을 쌓아 외부로부터 엄폐하였다. 또한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한 도랑(垓字)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지형의 변형으로 지금은 확인이 불가능하다.

 

 

<구릉 위에서 바라본 구영등성>

 

 

<구영등성에서 바라 본 마을모습>

 

 

<구영등성 안쪽 모습>


구영마을을 지나 장목면으로 가다보면 황포마을이 나오면 58번 국도가 5번 국도로 바뀌는 곳이다. 여기에 인근의 학생들을 공부시키던 황포초등학교가 있다. 거제에서도 가장 오지라는 곳인데 예전에는 섬으로 발령을 받아서 가는 선생님들이 이곳을 가장 선호 했다. 그 이유는 황포마을이 마산과 진해에서 거제로 가는 바닷길의 경유지 역할을 한 곳이었기에 교통편이 좋은데 비하여 점수가 높게 평가되기 때문이었다. 황포를 지나 5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요즘 한창 공사가 마무리되고 있는 골프장을 보게 된다.


 

 

<장목진 객사 전면모습>


장목면에 도착하면 이순신 장군의 충혼이 남아있는 장목진 객사(長木鎭 客舍)가 있어 충무공의 충절을 엿볼 수 있다. 장목진 객사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이영남 장군이 전략을 모의했다고 전하는 장목진 객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와가이다. 원래는 객사(客舍), 아사(衙舍), 내아(內衙), 문루(門樓), 군관청(軍官廳), 이청(吏廳), 사령청(使令廳), 기상청사(己上廳舍) 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객사만 남아있다. 이곳과 인접하여 ‘구율포성’과 ‘구영등성’이 진해만과 가덕수로를 마주하고 있어 왜구의 출몰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으나 바다에서는 이곳을 쉽게 볼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 이다.


 

 

<현판 및 상량문>

 

 

<장목진 객사 안쪽의 우물모습>

 

 

<장목진 객사 내에 있는 비석군>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거제 장목진 객사(長木鎭 客舍)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89호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219-18


거제는 왜구의 침략이 심하여 조선 초기에 7개 군진(軍陣)을 설치하였는데 장목진은 그 중 하나이다. 이 객사의 상량문에 의하면 본래 장목리 동구(東歐)에 있던 것을 1592년(선조 25)에 서구(西歐)로 옮겨와 지은 것이라 한다. 지금의 객사는 1785년(정조 9)에 중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으며, 1914년부터 1953년까지는 장목면(長木面) 사무소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에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객사란 공무로 출장 온 관원이나 고을을 찾는 중요한 손님들이 묵는 숙소이자 건물의 중앙(正堂)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신 공간이다. 따라서 출장 중인 관리나 수령은 반드시 이곳에 들러 임금의 전패에 절을 올려야 했다. 곧 객사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지방 공공건물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의 장목 객사는 겨우 담장과 출입문으로 외부와 경계를 이루었고 부속건물도 없이 본채만 덩그러니 남아, 위풍당당한 왕조의 권위는 사라져 버렸다. 또 기둥도 외곽만 둥근 배흘림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각진 기둥을 써 일반 가정집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다만 막돌로 1m가 넘게 쌓은 석축만이 옛 영화를 전해 준다. 이곳 장목진은 거제의 북쪽 끝에 위치한 관계로 진해만 일대를 방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전략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옥포(玉浦)전투와 칠천(漆川)전투를 앞두고 이곳에서 전략을 논의하였다.

 

 

<밖에서 바라본 장목진 객사>

 

 

<율천리 마을과 구율포성의 흔적>


장목진 객사를 나와 장목 삼거리에서 다시 58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우측 방향으로 가면 장목면 율천리 마을 앞을 지나게 되는데 이 율천마을에 ‘구율포성(舊栗浦城)’지 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이 구율포성지는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과 함께 임진왜란 발발부터 칠천량해전까지 13번의 전투에서 12회 이상의 승리를 거두어 사후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이순신, 권율과 더불어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던 “원균 장군”의 전사지이다.
우리가 원균 장군에 대해 홀대를 한 것은 이순신 장군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과정에서 반대되는 캐릭터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과 공적에 있어 쌍벽을 이루는 훌륭했던 원균 장군을 비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균 장군의 비하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근거를 하고 있는데, 이순신 장군이 일기를 남김으로써 일기를 쓰지 않은 원균 장군을 일방적으로 포악한 사람으로 표현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을 볼 때, 역사는 기록한 자의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구율포성의 성곽 모습>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구율포성(舊栗浦城)
경상남도 기념물 제206호
거제시 장목면 율천리

 


이 성은 원래 외포 바닷가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해지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구율포성은 평지에 돌을 쌓아 올린 것으로, 축조시기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규모나 형태, 축조 수법 등으로 미루어 조선 성종(1470~1494) 때에 축조된 것으로 보여 진다. 임진왜란 때는 경상우도의 해군 본부에 소속된 방어시설이었다. 특히 1597년(선조 30)에 있었던 칠천량(漆川梁) 해전 때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원균(1540~1597)이 전사한 곳으로 유명하다.
성은 대부분 훼손되어 그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 흔적을 따라가면 대체적인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의 구조는 남북 양쪽에 반원형의 성문이 있으며, 성문 위에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낮은 담(성가퀴)을 설치하였다. 입구에는 ‘ㄱ'자 모양의 또 다른 성(甕城)을 마련해 외부로부터 완전히 엄폐되어 있다. 남쪽 성문의 옹성(甕城)은 그런대로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북쪽 성문의 옹성은 흔적만 남아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동쪽과 서쪽에도 성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워낙 훼손인 심하여 흔적을 확인할 길이 없다. 성의 규모는 둘레 550m, 높이 3m, 폭 4m이었다고 한다.


 

<구율포성의 해자가 있을 법한 자리에 민가가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