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조선의 치욕을 노래하는 ‘장량상 동정마애비’

천부인권 2010. 12. 11. 11:58

 

 

 

남해의 작은 어촌마을 선소리 바닷가에 조선의 치욕을 노래하는 마애비가 있으니 이 땅의 주인들이 다시는 이런 역사를 만들지 않아야하겠지만 지금도 그때의 상황과 별로 다른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한심스러운 나라의 국민인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입으로만 큰소리치면서 나라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과거 조선이나 현재 대한민국에서나 똑 같이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 선소리 바닷가에 있는 장량상 동정 마애비의 치욕을 모르고 산다.


1592(선조 25)~98년에 2차례에 걸쳐 왜놈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왕이라는 작자는 백성을 버리고 자신만 살기 위해 중국으로 도망을 가자 백성을 버리고 가는 저런 왕은 백성들이 필요 없다고 하면서 도망가는 선조(宣祖)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그런 수모를 겪은 왕이라는 작자가 백성들이 피로 이 땅을 지켜내자 또 다시 돌아와서 왕이랍시고 숱한 영웅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권좌를 차지했다. 그 과정 속에서 이순신은 왜놈의 조총에 가슴을 내밀어 죽음을 맞이했고, 의병장 곽재우는 굶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연평도에 적의 포탄이 떨어져도 맞대응도 못하면서 요란스런 언론 플레이나 하다보니 백성의 죽음은 나 몰라라 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책임은 MB정권이 고스란히 가지고 가야하는데, 벌써 책임은 온대간대가 없다.

 

경남유형문화재 제27호로 등록된 ‘장량상 동정 마애비(張良相東征磨崖碑)’는 이순신에 의해 노량해전에서 대패하고 도망가는 왜놈들을 즉시 쫒아가 척결해야 함에도 명나라 장수들은 왜놈이 도망갈 기회를 주면서 천천히 뒤 따라갈 뿐이었다. 도망가는 왜놈들에게 이 땅의 백성들은 또 다시 피해를 입었지만 명나라 장수들은 자신들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왜놈이 다 도망가고 없는 선소리왜성에 입성하여 모든 것이 자신들의 공이라고 ‘장량상 동정 마애비’에 새겼다.

 

‘장량상 동정 마애비’라고 명명한 것은 장량상이라는 명나라 유격대장이 글을 썼고, 비문의 첫줄에 동정시라고 적어 두었기에 ‘동정’이라고 넣고, ‘마애비’란 자연 암반을 다듬어 글을 새기거나 부처를 새겨 둔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장량상 동정 마애비(張良相東征磨崖碑)
경남유형 문화재 제27호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69-9


이비는 임진왜란에 참전(參戰)한 명(明)의 장군 이여송(李如松)과 진린(陳璘)의 전승 기념비이다. 명나라 장수 장량상(張良相)이 비문을 썼다고 하나 언제 쓰여 졌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대략 1598년(선조 31)의 노량해전 직후로 추정된다.
비문을 쓰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노량해전에서 대패한 왜군 500여명이 관음포(觀音浦)에서 함선을 버리고 이곳 선소리의 왜성으로 후퇴하였으나 성안에 왜군이 모두 달아나고 없었으므로 다시 바다로 도망하였다. 명나라 군사들이 왜군을 추격하여 성에 들어왔으나 왜군이 모두 도주한 후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장량상이 해안가 자연암반에 비문을 썼기 때문에 마애비(磨崖碑)라 부르며 비문의 첫줄에 ‘동정시(東征詩)’라는 글씨가 있어 동정시비(東征詩碑)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마애비이다.

가로 131cm, 세로 253cm의 크기로, 자연석을 평평하게 다듬은 뒤, 5cm정도의 깊이로 글자를 새겼다. 테두리는 당초문(唐草文)으로 장식하여 장엄한 느낌을 준다.

 

 

 

 이 비에 적어 놓은 내용은 이러하다.

 

 동정시(東征詩) 


  만력 26년(1598) 늦가을에 나라의 동쪽에 다시 일이 있게 되었다. 때는 마침 조선이 왜놈들의 침입을 받아 7년에 이르렀다. 우리는 군사를 보내어 이들을 구원하였으나 아직도 이겼다는 보고가 없다. 천자께서는 벌컥 성을 내시어 곧 내각의 여러 고관들에게 가서 군사들을 살펴보라고 명하시었다.
  경리(經理)와 총독(總督)을 겸한 대사마(大司馬) 형공(邢公. 명나라 장수 형개[邢玠])과 도독 진공(陳公. 명 수군제독 진린) 이하 문무 장신(將臣) 십 여인들이 조선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만나기로 하여 다투어 압록강을 건너 두어 갈래의 길로 함께 진군하게 하셨다.
생각하건대 형공과 진공은 웅대한 자략으로 세력을 신장하여 아름다운 기풍을 삼고 범이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듯이 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협조하여 심력을 다 기우려 충성스런 지모로 낙랑(樂浪. 지금의 평양)을 거쳐 계림(鷄林. 경주시)을 지나 부산으로 나아가 군사력을 떨쳐 왜놈들을 봉쇄한 뒤에 돌려보냈다. 태사씨(太史氏) 구대상(區大相. 명나라 문신)은 예로부터 제왕들은 군사를 내어 전쟁을 하면, 모두 씩씩한 군대의 위용으로써 국위를 떨치고 동시에 수고로이 원수를 물리친 것을 칭송하는 말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저 명나라와 조선의 군사들은 섬 오랑캐를 물리쳐 폭동과 반란을 제거하고 만전을 꾀하였다. 모든 일은 반드시 싸워 이겨 여기에서 순리로 다스려 위엄이 이처럼 성하니 멀리 와서 정복하여 물리친 것을 밝혀 보이어 길이 알린다.
  이에 시 2장을 지었으니 비록 공석(孔碩)이 지은 것이지만, 거의 위엄을 드날리기에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 노랫말은 아래와 같다.

 

  황제의 성냄이여! 변방의 난 평정했네.   皇赫怒兮 定夷亂(황혁노혜 정이란)
  장사의 분발이여! 쉴 겨를 없었다네.     壯士奮兮 不遑宴(장사분혜 불황연)
  긴창을 비껴 듦이여! 화살도 세게 쐈다!  橫長戟兮 菔勁箭(횡장그혜 복경전)
  완전무장 빛남이여! 별들도 밝게 빛나!   組甲耀兮 星辰煥(조갑요혜 성진환)
  발해바다 건뜀이여! 파도도 잔잔쿠나!    蹴溟渤兮 波濤晏(축명발혜 파도안)
  긴 칼 날림이여! 동쪽의 바닷가라!       猗長劍兮 扶桑岸(의장검혜 부상안)
  백성의 받듦이여! 왜놈들이 항복했다.    佃極奠兮 鰲足斷(전극전혜 오족단)
  황제의 성냄이여! 해외까지 벌벌 떠네.   皇極震兮 窮海外(황극진혜 궁해외)
  나라밖 정벌이여! 죽은 해골 고요하네.   征不庭兮 靜殊髏(정불정혜 청수루)
  무장병 기쁨이여! 공을 따라 매진했네.   甲族悅兮 從公邁(갑족열혜 종공매)
  왜놈들 막음이여! 생선회를 치듯했네.    封鯨鯢兮 戢鱗介(봉경예혜 집린개)
  부릅뜬 눈방울여! 땅끝까지 다 살폈네.   加目出兮 極地界(가목출혜 극지계)
  공바위 새김이여! 길이길이 전해지네.    標穹喝兮 際荒裔(표궁갈혜 제황예)
  이역땅 멀리 옴여! 가주로 모셔지네.     異城來兮 嘉主會(이성래혜 가주회)

 

명나라 만력 27년(1599) 3월 상순 길일에 세움
독공 정왜 유격대장  장   양   상 

 

 

출처 : 이충무공 노량해전승첩제

 

 

 

그래도 남해 선소리 마을에서 바라본 남해바다는 그 치욕의 역사와는 아무른 상관이 없는 듯 한가하고 아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