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통영 세병관은 전쟁은 하지 말라고 한다.

천부인권 2010. 12. 31. 13:33

 

 
2011년에는 우리민족이 전쟁 없이 하나가 되라는 의미로 세병관의 참 뜻을 되새겨 본다.

오후 4시가 넘어서 통영 세병관에 도착하니 통제영 복원공사가 한창이라 통제영 인근의 모습이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향토역사관 맞은편 수항루(受降樓)의 모습이 처음으로 보였다.

통제영 복원사업 개요


문화재명 : 통제영지(사적 제402호)
위치 : 통영시 문화동 62번지외 28필지
면적 : 41,022m²(12,409평)
사업기간 : 2000년~2010년
사업비 : 596억원(국비 359, 지방비 237)
-관아 등 건물 복원 비 : 376억 
-주차장 등 기반시설비 200억원
-기타 : 20억원
사업내용 :
-복원대상 건물지 발굴조사
-주요관아 건물복원(운주당 등 30여동)
-주차장, 상설공연장 설치 등 기반시설공사

 

 

「수항루(受降樓)」는 임진왜란의 승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1677년(숙종 3) 제57대 통제사 윤천뢰(尹天賚)가 건립하고 제74대 통제사인 이홍술(李弘述)이 재건하였으며, 1775년(영조 21)에 제117대 통제사 이장오(李章吾)가 확장 중건하였으나 일제 때 훼철되었다. 이곳에서 춘추에 군점행사를 하면서 왜병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의식을 하였으며 역대 통제사와 많은 시인묵객들이 시정을 나누기도 하던 곳이다. 수항루는 본래 한일은행 부근에 위치하였으나 이 일대는 건물이 밀집된 번화가이므로 부득이 통제영 본관이던 세병관 경내에 복원하여 극일론을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며 금석문으로 새겨 놓았다.


 

 

이곳 통제영지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통제영지(統制營址)
사적 제402호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 62번지

 


이곳은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 본영(三道水軍統制營 本營)의 자리로 선조 37년(1604)에 설치되고 고종 32년(1895) 폐영(廢營)될 때까지 3도(경상. 전라. 충청)의 수군을 총 지휘한 관방(關防)유적이다.
임진왜란 당시 초대 통제사로 제수(除授)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장군의 한산진영(閑山陣營)이 최초의 통제영이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천혜의 요항(要港)인 이곳 두룡포(頭龍浦 : 지금의 통영시)에 제6대 이경준(李慶濬) 통제사(1604년)가 본영을 창건하고부터 제208대 홍남주(洪南周) 통제사 제임 시까지 무려 290년간 왜적의 재침을 방비하는 조선 수군의 총본영으로 오늘날 해군본부와 같은 곳이었다.
그 당시에는 세병관(洗兵館), 운주당(運籌堂), 백화당(白和堂), 중영(中營), 병고(兵庫), 장원홍예문(牆垣虹霓門), 교방청(敎坊聽), 산성청(山城聽), 12공방(十二工房) 등 100여동의 영문(營門) 관아(官衙)들이 즐비해있으나, 지금은 세병관(국보 제305호)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통제영지는 1998.2.20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향후 연차계획으로 사적정비에 나설 예정이다.

 

 

 
세병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 망일루(望日樓)를 오르는 돌계단이 숱한 세월과 뭍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닳아 있는 모습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망일루 아래를 지나 직선 선상의 높은 계단 위에 세워져 있는 솟을삼문인 지과문(止戈門)에 오르면 세병관과 함께 커다란 세병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지과문(止戈門)의 뜻을 살펴보니 ‘그칠지-止, 창과-戈’로 창을 멈춘다는 뜻이지만 결론은 전쟁(戰爭)을 멈추게 한다는 뜻이다.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이순신 장군의 검에도 이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하니 전쟁은 과거에나 현재나 미래에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반인륜적 행위이다. 이 지과문의 주춧돌은 다소 해학적 모습을 한 해태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머리가 밖으로 향해 있는 것으로 볼 때 밖으로부터 들어오려는 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불의 기운을 다스리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봤다.


 

 

 

 

 

 

 

세병관 현판은 제136대 통제사인 서유대(徐有大)가 쓴 글씨로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의 마지막 구절 "안득장사만천하(安得壯士挽天河) 정세갑병장불용(淨洗甲兵長不用)."이라는 대목에서 인용했다고 전하는데, 그 뜻은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라고 한다.

 

 

이곳 세병관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세병관(洗兵館)
국보 제305호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 62번지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로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이곳에 통제영을 옮겨온 이듬해인 1605년에 처음 세웠고, 제35대 통제사 김응해(金應海)가 1646년에 규모를 크게 하여 다시 지었으며 제193대 통제사 채동건(蔡東健)이 1872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9량구조 단층 팔작집으로 경복궁 경희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지금 남아있는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바닥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 중 하나이다.
장대석 기단, 50개의 민흘림기둥, 2익공양식에 벽체나 창호도 없이 통칸으로 트여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웅장한 위용이 통제영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시설한 것이나, 안쪽의 중앙 3칸만은 한 단을 올려 전패단(殿牌壇)을 만들고 상부를 소란반자로 꾸민 후 3면에 분합문을 두어 위계를 달리하였다.
세병이란 만하세병(晩河洗兵)에서 따 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며, <세병관(洗兵館)>이라 크게 써서 걸어 놓은 현판은 제136대 통제사인 서유대(徐有大)가 쓴 글씨이다.

 

 

 이곳 두룡포 기사비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두룡포 기사비(頭龍浦 記事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통영시 문화동 62번지

 


이 비는 선조 때 이 곳에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설치한 이경준의 치적을 기록한 ‘이경준 사적비’이다. 현재 비석은 세병관 내 수항루 뒤편에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는데, 받침대 없이 비석과 머릿돌(螭首)로만 구성되어 있다. 두룡포는 원래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경준이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옴으로써 전략적인 요충지가 되었다.
비석은 1625년(인조 3)에 제16대 통제사였던 구인후(具仁后)가 세웠다. 이 비석은 원래 통제영의 영문()자리에 세웠던 것을 1904년에 현 위치로 옮겨 왔다. 비문은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의 부사였던 박홍미(朴弘美)가 지었다. 비문은 아랫부분이 마멸되어 판독이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대체로 그 내용은 확인된다. 비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함께 통제사 이경준의 약력(略歷)과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하늘을 오르며 하나의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세병관의 동쪽 방면에 통제영의 역사를 말해주는 비석군이 도열해 있고 이 비석군의 벼슬의 위치가 희선대부급 이상의 상당히 높은 벼슬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언덕 아래에는 2003년 11월에 복원된 운주당 영역이 자리하고 있는데, 운주당, 경무당, 병고, 내아동의 건물이 서있다.

 

 

 

 

 

 


운주당(運籌堂)은 인조 23년(1645)에 이완(李浣) 통제사가 경무당과 함께 창건했으며, 운주란 ‘운주유악지(運籌唯幄之)’ 중에서 나온 말로 군막속에서 전략을 세우는 것을 말함이니 통제사가 통제영 군무를 보는 집무실이다.
경무당(景武堂) 역시 이완(李浣) 통제사의 집무실인데 이충무공의 뜻을 크게 우러러 본다는 의미에서 연유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