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진해 제황산의 전설로 남은 진해탑

천부인권 2011. 2. 4. 15:27

 

 

 <진해탑 전경>

진해탑산은 산의 모양이 부엉이를 닮았다하여 옛 날에는 부엉산으로 불렸으나, 해방 이후에 제황산으로 지명을 바꾸었지만 왜 제황산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해발 90m산 정상에는 1927년 일본이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하여 노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현해탄 해전의 기함이었던 ‘미카사’ 전함의 마스터를 본딴 전승기념탑을 세웠다. 해방 후 이 탑은 대한민국의 치욕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헐고 1967년에 해군군함을 상징하는 탑을 건립하였지만 기초부분은 그대로 두어 지금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1년 계단입구와 모노레일 승강장>

 

<사진출처 : 진해 제황산공원 모노레일카>

 

일제가 세운 기념탑에는 도고 헤이하치(東鄕平八郞)원수의 필적인 "일본해해전기념(日本海海戰記念)"의 7자와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의 찬문이 새겨져 있었다하며, 찬문 가운데는 러시아의 태평양함대를 만나 도고원수가 전 함대에 보낸 명령이 나와 있었다한다. 그 내용은 "일본(皇國)의 흥폐가 이 전투에 걸려있다. 모든 병사들은 일층 분투노력하라."는 것이라 전한다. 이를 본받은 것인지 1년 계단을 오르는 곳과 진해탑의 정면에는 대한민국 독재자의 상징인 다까끼 마사오(박정희)의 친필인 ‘제황산공원(帝皇山公園)’과, ‘진해탑(鎭海塔),이라는 글자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면서 바라본 중원로터리>

중원로타리에서 제황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365개로 되어 있어 1년 계단이라고도 하며, 2009. 03. 25에는 모노레일(174m, 카2량), 승하차장(303.27㎡), 편의시설(81.21㎡)를 설치하여 진해탑으로 오르기 쉽게 하였다. 진해탑은 높이 28m의 9층탑이며, 면적 3,068㎡으로 진해시가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건물 안에는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어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탑내부 1,2층에는 진해시에서 발굴된 각종유물과 문화재 등을 전시한 시립박물관이 있어 진해의 역사와 문화유물을 감상할 수 있고 탑 외부에 경관조명시설을 갖추어 야간에도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탑 꼭대기에서 바라본 경화방향 시가지>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탑 꼭대기에서 바라본 구진해시가지>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탑 꼭대기에서 바라본 장천방향>

 

 

전설로 살아있는 전승기념탑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러일전쟁 전승기념탑의 전설이 살아있는 제황산

 

제황산의 옛 이름은 부엉등 또는 부엉산이다. 지금 이 산 정상에는 진해탑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그 진해탑이 서기 전에는 일제의 러일전쟁 전승기념탑이 서 있었다. 그 탑을 세울 때의 일이다.
탑을 세우기 위한 기초 공사를 하던 어느 날 묘법사 주지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 말하였다.
“무도한 일본놈들이 나의 두상을 깎아버려서 이렇게 피를 흘리고 있다. 너는 도를 닦은 승려이니 일본 해군 사령관에게 공사를 즉시 중지할 것이며, 본래대로 산봉우리를 복구할 것은 물론 다시는 이런 무례한 짓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어라, 만약 내 말을 그대로 이행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재앙이 따를 것이니 잊지 말아라.”
묘법사 주지스님은 지체하지 않고 일본 해군 사령관에게 꿈이야기를 하였으나 사령관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진창선 철도개설 기념회가 얼마 후 열렸는데 이를 관람하기 위하여 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배를 타고 현동 부두로 입항하려다가 전복하여 많은 희생자가 났다. 그 후 부엉산 산신령이 묘법사 주지스님에게 다시 나타나서 말하였다.
“내가 너에게 부탁을 하여도 공사를 중지하지 않아 내 영험을 바다에서 보였는데도 믿지 않으니 다시 경고한다. 공사를 즉각 중지하고 본래대로 다듬어 놓지 않으면 큰 변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묘법사 주지스님은 또 다시 일본 해군 사령관에게 꿈이야기를 하였으나 사령관은 이번에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산에서 변이 생겼다. 케이블카 다섯 대에 선재를 실어 산정으로 끌어올리다가 와이어로프가 끊어지면서 케이블카가 산산조각이 났는데 일을 하던 중국인과 한국인은 다치지 않고 일본인들만 사상자를 내었다. 그러나 공사는 계속되어 기념탑은 준공되었다.

 

<출처>
제  목 : 「경남전설을 찾아서」
발행처 : 농협중앙회경남지역본부
발행일 : 1997/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