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천하의 명당이라는 천자봉 등반을 하다.

천부인권 2011. 2. 11. 06:30

 

 

천하의 명당이라는 천자봉에는 조선개국의 전설과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의 전설이 전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명성황후가 순종(純宗)을 낳고 명산마다 세자의 무병장수와 국태민안을 비는 100일 기도를 올린 곳으로도 유명하다.
진해구 장천동 천자암까지 차를 타고 올라가 입구에 주차를 하고 뒤편 산을 보니 깎아지른 절벽의 봉우리가 보인다. 이제까지 천자암 뒤편의 봉우리가 천자봉으로 알고 있었는데, 절벽을 이룬 봉우리는 독수리의 날개를 닮았다 하여 ‘수리봉’이라 부른다한다.


 

 

 

 

 

 오늘의 등산코스로 천자암→만장대→천자봉→수리봉→철탑을 지나 천자암으로 돌아오는 길을 선택했다. 천자암을 구경하고 나와 임도를 따라 1km 걸어가니 우측에 팔각정이 있고 좌측으로는 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보였다.

 

 

 

 이 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만장대’가 나온다했다. ‘만장대’에 거의 다가가니 등산로에 산불을 끄기 위한 큰 물통 두 개가 있다.


 


 

 

 

 

만장대에 오르니 꽤 너른 평지가 펼쳐지고 진해구에서 해마다 이곳에서 새해맞이를 하는 곳이라 천자봉을 바라보고 산신제를 올리는 산신단이 놓여 있다. 또한 나무로 만든 평상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고 팔각정도 세워져 있다. 이곳이 천자제2봉으로 여기저기 묘지가 보이는데, 묘지 앞에 세워져 있는 비석의 이수(螭首)을 보면 별이 새겨져 있어 군에서 장군을 지낸 사람의 묘지임을 알 수 있다.


 천자봉에서 진해만으로 굽이쳐 흘러가는 봉우리마다 명당을 남겨두었다고 하여 이름을 남기려는 집안에서 천자봉의 봉우리마다 앞 다투어 이렇게 높은 산 정상에 묘지를 사용했다. 일설에는 천자봉은 명당의 혈이 맺힌 곳이 9봉까지 있는데, 제1봉에서부터 제6봉까지 묘소를 쓴 집안에서 장군들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실제로 등산을 하면서 보게 되는 비석마다 별이 새겨져 있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천자봉을 명당으로 부르는 이유는 이곳의 지형을 하늘에서 보면 ‘天(하늘천)’자를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천자봉에 쇠말뚝을 박기도 하였고, 이곳의 정기를 끊어버리기 위해 국도 2호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런 명당 이야기를 접하면서 생각해 본 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그 위에 군림하기 위해 온갖 짓거리를 다하는 것은 과거나 현재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 것은 뛰어난 몇몇의 사람이 많은 무리를 안정적으로 먹여 살리기 위함인데, 이러한 문명의 발전 원리와는 상관없이 몇몇의 뛰어난 사람이 재력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더 많은 부와 권력을 행사하려 하기 때문에 인류사회에는 끊임없이 분쟁과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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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봉 정상에 오르니 이곳에도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인간의 간절한 소망이 남을 지배하여 자신들의 후손만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명당을 찾아서 이런 곳에 묘소를 사용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든다.

 

 

 

천자봉 정상에서 웅천방향을 보니 산 아래 첫 마을이 백일마을이다. 백일마을에 갔을 때 보다 이렇게 산 위에서 내려다보니 마을의 규모가 훨씬 크게 보인다

 


 

 

등산객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 더 이상 지체하기를 포기하고 수리봉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수리봉으로 가는 산등성이는 공룡의 등뼈를 연상하게 하는 바위들이 즐비하다. 


 


 

수리봉 정상에서 깎아지른 벼랑 아래를 보니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수리봉 아래의 천자암은 거의 계곡과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수리봉에서 ‘시루봉’방향을 보니 시루봉으로 가는 나무계단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시루봉 뒤편에는 불모산 정상의 중계탑이 자리하고 있다. ‘시루봉’에는 아천자(雅天子)의 사랑이 남긴 전설이 있으니 그 사랑 이야기와 임진왜란 때 잡혀간 도공들의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한다.


 

시리(시루)바위(甑岩) (1)

 


옛날 대마도(對馬島)의 한 역관(譯官)이 웅천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었다.
그 역관은 당시 이 고을에서도 이름난 기생과 꿀맛 같은 사랑에 빠져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그 기생의 이름을 아천자(雅天子)라 하였다.
그러다가 역관은 떠나고 홀로 남은 아천자는 돌아오지 않는 역관을 기다리며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기약없이 떠난 님을 기다리며 날마다 천자봉 꼭대기에 앉아서 멀리 대마도를 바라보며 눈물짓던 기생 아천자는 그대로 망부석이 되어 버렸다. 훗날 일본 사람들이 이 바위를 히메이와(姬岩)라 불렀으니 이는 아천자의 애닮픈 사랑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시리(시루)바위(甑岩) (2)

 


지금의 녹산 일대에는 도자기의 원료인 백토가 많이 나온다. 따라서 이 고장에는 옛날부터 도공이 많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조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 나라를 침략한 왜적들은 이곳의 도공들을 많이 포로로 잡아 갔다.
고국산천을 떠나 낯은 이국땅에 포로 신세가 된 도공들은 망향의 시름을 달래기 위하여 시루바위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고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들이 잡혀갔던 일본의 이와데(岩手)현의 어떤 도기촌에는 시루바위의 모양이 남아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