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생각하다

적성현감(積城縣監) 노온(盧溫)의 묘

천부인권 2012. 5. 26. 07:46

 

명곡동 뒷산으로 오르는 구릉 끝자리에 적성현감을 지낸 노온의 묘가 있다. 노온은 창원 명곡인(明谷人)으로  선조 21년(1588) 무과에 합격하여 수문장(守門將)으로 지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토벌한 공으로 삼등훈(三等勳)에 봉해졌고 적성현감을 지냈다고 창원향교지는 적고 있다.

 

 

 

노온 선생의 묘 정면

 

그의 묘는 원형을 띠고 높이는 150cm 정도 이다. 묘 앞에는 비와 이수를 한 돌에 새겼으며 정면에 조봉대부적성현감노온지묘(朝奉大夫積城縣監盧溫之墓)라는 글이 음각으로 새겨져있고 1645년 10월에 자손이 세운 것이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113cm, 비신의 크기는 높이 66cm, 폭 58cm, 두께 7.5cm이다. 창원대 박물관에 의하면 “묘의 좌, 우에 문. 무인석이 세워져 있는데 창원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얼굴을 포함한 전체의 형태는 매우 간략하고 양쪽에 쥔 것은 홀인지 칼인지 알 수 없으나 좌측에 있는 것이 눈이 부리부리하고 큰 것으로 보아 무인석으로 보인다. 머리위에는 부처의 육계와 같은 혹이 두 개 있는 것이 특징이다. 높이는 77cm이다.”고 적고 있으나 현재에는 도둑을 맞았는지 사라지고 없다.
지금은 문, 무인석이 없는 대신 근래에 만든 망주석이 좌우에 세워져 있으며 화강석으로 축대를 쌓아 예전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노온 선생의 묘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노공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는 조갈내(早渴川)의 유래인데 명곡동으로 내려온 후 노온 선생은 신성재(新成齋)라는 재실을 짓고 인근의 선비들을 불러 낙성설연(落成設宴)의 잔치를 열었는데 사화에 살던 박신윤 선생도 초대되었으나 음식을 먹지 않아 물어보니 “병석에 누워계신 노모(老母)을 생각하니 먹을 수가 없다.”고 하니 이에 노공(盧公)이 “특별히 노모(老母)에게 드릴 음식을 준비하여 놓았으니 염려하지 말고 드시라”고 권하여 음식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박공에게 노공(盧公)이 덕경지효(德卿之孝)를 칭찬하며 하인 2명을 수행하여 집으로 보냈는데 때마침 내린 비로 집으로 가는 내에 물이 차서 건너 갈 수가 없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탄식하기를 “나의 불효한 죄를 하늘이 꾸짖어 죄를 준다.”며 통곡을 하자 말을 다하기 전에 냇물이 갈라지고 징검다리가 노출되어 무사히 내를 건너 집으로 갔다. 이를 하인들이 돌아와 노공에게 사실을 알리니 노공은 출천지재덕경지효야(出天之哉德卿之孝也), 감천재덕경지효(感天哉德卿之孝)라 칭찬하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하늘도 감복한 효자의 이야기를 전했다 한다.

 

 

조갈내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