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동례리 느티나무’를 구경하고 다시 차에 오를 때 비가 진눈깨비로 변하여 제법 겨울 운치를 내고 있었다. 경남 문화재자료 제401호인 검암리 운수당의 주소(금곡면 115-1, 도로명 주소: 금곡로197-20)를 네비에 입력하고 약 1km에 이르자 우측의 금곡로로 인도를 한다. 영천강 검암교를 지나고 검암리 운문마을 입구인 약1.3km에 이르자 윗돌 앞면에는 ‘하늘머리 구름마을 임금나무’라 적고 아랫돌 앞면에는 “임금나무 가지마다 별달따해 피어난다.”라는 문구를 적은 커다란 비갈이 보여 일단 차에서 내려 촬영을 했다. 이 비갈의 뒷면에는 “단군제국 하씨문중 신주목(神主木), 검암 운문(檢岩 雲門)”이라 적혀 있다.
<비갈의 뒤면 모습>
<자연입석이 세워져 있고 껍질만 남은 느티나무가 세월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옆으로는 5개의 죽은 나무가 세워져 있고 거의 껍질만 남은 느티나무 한그루와 작은 느티나무 2그루가 심어져 있어 이곳이 하씨문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임을 알게 한다. 진주 하씨의 중시조인 운수당 하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마을 사람들을 만나보지 못해 곧장 운수당으로 차량을 몰았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좌회전을 하여 200m여를 가면 ‘웃글문저수지’가 나오고 저수지 위쪽에 운수당이 자리하고 있다. 운수당 앞마당에서 직선거리로 300m여에는 ‘경남문화재자료 제404호’인 진주 검암리 운수당 하윤묘 석상(晋州檢岩里雲水堂河潤墓石像)이 있는 “금곡면 검암리 산 45-6번지”이다. 그러나 제법 많은 진눈깨비가 내리기에 이곳의 방문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운수당을 구경하기로 했다. 운수당 옆에는 운수당을 관리하는 관리사인 듯한 집이 한 채 있어 물어 보려고 불러 보았으나 인기척이 없어 결국 운수당 담장 밖에서 구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운수당(雲水堂)은 관리사 옆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정면의 네 기둥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다. 좌측에 있는 집안의 사랑채를 옮겼다는 망추정은 측면이 3칸인 팔작와가 인데 문짝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정문 구실을 하는 ‘운화문(雲和門)’은 요즘 만들어 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운수당의 다른 방향 모습>
<운수당 입구인 팔각지붕 와가 출입문인 운화문>
<사당의 입구인 덕후문>
<측면에서 바라본 운수당 전경>
그리고 우측에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워진 솟을삼문으로 이루어진 덕후문(德厚門) 쪽은 3동의 건물이 더 있는데 맨 위쪽은 경인사(景仁祠)로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용하고 그 우측에 작은 건물은 제기 등을 보관하는 건물로 추정 된다. 이 두 건물은 맞배지붕와가 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팔작지붕의 형태를 이룬 건물로 운강서원(雲岡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은 지붕의 재질이 함석이나 청동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곳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진주 검암리 운수당(雲水堂)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01호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115-1
운수당(雲水堂)은 하윤(河潤 1452~1500)을 모신 재실이다. 재실의 구조는 정면에 운수당[일명:永慕齋]을 두고 좌측에는 집안의 사랑채이던 망추정을 옮겨 세우고 재실의 정문으로 문을 설치하였다.
재실은 일반 살림집과는 달리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관들의 숙식과 제구를 보관하며 제수를 준비하는 곳으로 문중사람들이 모여 제례절차나 문중 일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곳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후손들을 가르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는데 이때는 서재(書齋)로 불리기도 한다.
재실인 운수당(雲水堂)은 중앙의 어간방을 돌출시켜 제를 지낼 때 위폐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좌우 협칸에도 방을 설치하여 참례자나 행사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당초부터 제사를 염두에 두어 쓰임새를 잘 고려한 점과 겹집형식으로 후퇴칸을 두어 안깊이가 큰 평면으로 확장하여 수장기능 등이 조선후기의 건축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하윤[河潤 1452~1500]은 본관은 진양(晋陽)이고 자는 수부(睡夫)이며, 호는 운수당(雲水堂)이다. 성종8년(1477)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83년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호조좌랑, 형조좌랑을 거쳤으며 1498년 폐비윤씨의 입묘추숭(立廟追崇)이 잘못임을 주장하다가 순천군수로 좌천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화를 면했으나 그곳에서 별세하였고 진주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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