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석채례가 있어 향기로운 구암서원 龜巖書院

천부인권 2013. 3. 5. 20:53

 

 

 

창원시 회원구 구암북4길 7-10(구암동 284-19)에 위치한 구연사(龜淵祠) 즉 구암서원은 천주산 용지봉(638.3m)에서 만수봉(470m)을 거쳐 곧장 애기봉으로 흘러와 애기봉 끝자락에 하나의 혈을 맺으니 곧 구암서원(龜巖書院)이다. 애기봉의 또 다른 경사면에는 자유. 민주. 정의의 산 체험장이고, 31인의 민주열사가 안치되어 있는 국립삼일오민주묘지(國立三一五民主墓地)가 자리하고 있다.

 

 

 

구암서원(龜巖書院), 구연사(龜淵祠)는 문정공과 충장공 부자(夫子)의 문·충(文·忠)의 얼을 배우고 그 유덕을 추모하여 향례(享禮)를 드리는 곳이다. 이곳은 평생 서원 복원에 매진한 충장공의 16대 후손인 겸재 정관석(謙齋 鄭瓘錫:1901~1982) 선생이 기거하던 재실로 문·충(文·忠)공(公)들의 덕을 추모하는 후손, 후학, 유림들의 모임인 모인계(慕仁契)의 주관으로 매년 음력 3월 22일에 석채례(釋菜禮:새로 나는 나물과 생 채소로 스승을 기리는 제사를 올리는 의식)를 봉행(奉行)하는 곳이다.

 

 

 

문정공교은정이오(文定公郊隱鄭以吾:1354~1434) 선생은 진주인(晋州人)으로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出仕)는 조선 태종(太宗) 때 하였으며, 한성부사 성균관 대사성(漢城府事 成均館 大司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승문원 제조(提調)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다. 하륜(河崙), 변계량(卞季良) 등과 더불어 태조실록과 국초(國初)의 법을 제정하고 편찬한 공을 세운 대문장도덕가(大文章道德家)로 세종 때까지 문신(文臣)으로 지내다 80세에 별세하자 왕명으로 이일철시(二日撤市)와 치제(致祭)와 문정공(文定公)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충장공애일당정분(忠莊公愛日堂鄭苯:~1454) 선생은 문정공의 아들로 태종 때 등과출사 하여 세종, 문종, 단종에 걸쳐 이조, 호조, 병조(내부, 건설, 국방)에 탁월한 업적을 쌓아 문종, 단종 때에 찬성(贊成)에서 우의정에 올랐다. 삼도도체찰사(三道都体察使:충청, 전라, 경상)로 외임중 소위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전남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가 1년 후 사사(賜死)되었다. 292년만인 1746년(영조 22년에) 당시의 충신들과 같이 복관(復官)에 이어 그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을 기리어 충장의 시호를 받았다. 후일 공을 추모하는 원사(院祠)가 진주 도동서원, 창원 회원구 구암서원, 장흥 충렬사, 공주 고로서원 등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구암서원(龜巖書院)중복기(重復記)


서원이 철폐(撤廢)되어 재실을 세워 옛날 그 서원처럼 다시 복원하였으니 이는 세운이 순환(循環)하여 강상(綱常)이 마침내 실추(失墜)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창원 구암(昌原 龜巖)에는 옛날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이 있어 교은 정문정공 이오(郊隱 鄭文定公 以吾)와 애일당 충장공 분(愛日堂 忠莊公 苯)의 부자분 양위(父子分 兩位)를 편히 모신 곳이다. 대개 이곳은 그 자손이 세거(世居)한 곳이요 또 문정공께서 일찍이 월영대(月影臺)에 유람(遊覽)하여 완상(玩賞)하던 곳이다. 충장공께서도 일찍이 삼남(三南)을 두루 다스릴 적에 그 은택(恩澤)이 미친 곳이기도 하다. 이 서원의 창설(創設)은 헌종 갑진년(憲宗 甲辰年 1884)에 고을 유림들이 성균관에 진정(陳情)을 하여 그 영향으로 대답을 얻어 짓게 된 것이다. 얼마 안 있어 고종 무진년(高宗 戊辰年 1868)에 서원 철폐령이 일어나 훼철(毁撤)되어 풀이 무성한 지가 오래다. 이에 여러 후손이 그 유허에 재실을 축조(築造)하여 옛 것을 기록하고 사모(思慕)함을 함께 나타내니 이것이 구암재가 된 것이다. 석농 오처사 진영(石農 吳處士 震泳 1969)에 여러 유림이 그 후손(后孫)과 함께 의논하여 말하기를 옛 서원의 훼철(毁撤)은 대개 일반적인 나라의 금지령(禁止令) 때문이나 이제 금지령이 해제(解除)된지가 오래고 또 옛 강토(疆土)가 광복(光復)되었으니 옛 모양대로 다시 중수한다면 서원 또한 옛날 그대로 회복(恢復)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하였다. 이에 다시 옛 터에 사우를 건립하여 옛 같이 봉안(奉安)하고 옛 재실(齋室)을 따라서 새로 중수하고 확장(擴張)하여 구암서원이라는 편액(扁額)을 걸었다. 이에 서원의 용모(容貌)가 비로소 구비(具備)되어 구제(舊制)가 회복되었다. 대저 옛날에 서원의 설립은 어진 이를 숭모(崇慕)하여 제사(祭祀)하고 윤리강상(倫理綱常)을 강명(講明)하여 그것으로써 인심(人心)을 격려(激勵)하고 토기(土氣)를 배양(培養)하였던 것이니 그것은 세도(世道)의 교화(敎化)에 관련된 것이 컸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중(重)히 여겼으나 그 말단에 이르러서는 혹 허성(虛聲)을 숭앙(崇仰)하여 실상은 잊어서 폐단(弊端)이 더욱 심하였는데 이것이 옛날에 철폐령이 내린 까닭이다. 그러나 철폐령이 있은 이후 국가 세도의 화변(禍變)이 더욱 많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으니 가히 그 까닭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지금에 와서 만에 하나라도 만회(挽回)코저 한다면 오직 그 폐단을 제거하고 그 근본을 돌이켜야 할 것이니 이 구암서원 회복의 취지(趣旨)가 어찌 여기 있지 아니하겠는가?
문정공은 개국에 참여하여 국법을 만들어 정하고 장례법(葬禮法)을 수찬(修撰)하여 반포(頒布)하여 백성을 예로서 가르치니 백성이 그 은택(恩澤)을 입었다. 충장공(忠莊公)은 어린 단종(端宗)을 도와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임금을 받들길 사생으로써 하고 큰 절개(節槪)가 초연하여 강상(綱常)을 붙들어 세우니 그 공과 그 의는 진실로 백세토록 가히 우러러 보인다. 조정(朝廷)과 국가가 표창(表章)하고 장려(獎勵)함과 사림이 숭앙하여 봉안(奉安)함은 모두 이 까닭이다. 이 서원에서 일삼는 것은 두 공(公)의 예교(禮敎)와 충의에 있다. 진실로 능히 감발(感發)하여 흥기(興起)하고 익히고 밝혀서 사모하고 따른다면 그 만나는 바에 각각 의(義)를 다하여 이단사설(異端邪說)에 흔들린 바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궁한(窮寒)한 음지(陰地)의 밑에서 한 오라기 빛을 기약(期約)하고 의지하면, 이것이 두 공의 유풍(遺風)을 잘 계승(繼承)하는 일이요, 또한 숭봉(崇奉)의 실제(實際)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약 한갓 제사나 지내고 모양(模樣)내는 것으로 능사(能事)로 삼는다면 마침내 가히 거들 실효(實效)가 없으니 결국은 옛날의 폐단으로 귀결(歸結)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렇다면 그 회복(回復)이 무슨 소중(所重)함이 되겠는가? 이것이 가히 경계(警戒)하고 두려워 할 바이다. 후손 관석(瓘錫)은 나의 옛 벗이라 높은 의지와 고절(苦節)은 사세(邪世)에 어지럽게 되지 않고 능히 선열을 계승하여 부지런히 이 역할(役割)에 힘쓴 것은 단지 선조를 사모하는 정성(精誠)에 말미암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세교(世敎)를 붙들려는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또 일직이 그 의론(議論)에 참여(參與)하여 들었는데 이 기문(記文)을 부탁(付託)함에 늙어 피폐(疲弊)하다하여 사양(辭讓)할 수 없었다. 대략 그 뜻을 발로(發露)하여 여러 유림들에게 고하노라.  -화산 권용현(花山 權龍鉉)-




2017.4.17 구암재기


龜巖齋記  
龜巖齋者 郊隱鄭文定公以吾 愛日堂忠壯公苯 父子院墟 後孫 齋焉而仍院之名 以寓慕講學之所也 若稽先王之典 有功者祀之 死事者祀之 盖鄭公兩世 爲 太祖開國贊成 文宗顧命大臣 父焉助定國典 而朝有常憲 撰頒葬法 而民服古禮 子焉賑飢民而王澤不渴 保幼主而大節莫奪之功之忠 皆合於祀典 而爲經邦樹綱之道 帝王可褒 士林可宗 百世而不可廢 夫旣以朝令撤院 祀典有時乎見格 此爲下不倍之義 而若夫典禮忠義 胡可一日而廢諸 典禮忠義之道而不明不行焉 則夷亂華獸食人 惡得以免夫大禍哉 後學爲先賢 亦可地不忍荒 水不忍廢 況後孫之於先祖乎 文定公嘗遊賞昌原之月影臺 忠壯公 巡遍乎三南矣 龜巖爲月影臺之上流 昌原爲三南之一州 而後孫世攸芋龜巖 院於斯亭於斯 宜二公之靈 尤眷顧而歆夫禮矣 後孫之不忍荒廢 而齋而慕之 不亦宜乎 鄭氏率循循有禮讓之風 承學先生君子之門 而與聞性命之理者 亦有之 吾知其不徒爲棟宇輪奐而謂不忘先祖 必晳晳乎其口 不絶講於禮義 勤勤乎其身 不離行於忠孝 始無失乎先王朝遺民 而二公之肖孫也 其始終齋舍者 曰奎璘 曰禹錫 曰庸錫 曰彰錫 使瓘錫請余記是爲我艮翁 先生徒也
閼逢 閹茂 仲夏日 首陽 吳震泳記


구암재기(龜巖齋記) 

구암재(龜巖齋)는 교은(郊隱) 문정공(文定公) 정이오(鄭以吾)와 애일당(愛日堂) 충장공(忠莊公) 분(苯) 부자의 서원이 있던 곳이다. 후손이 재실을 지어 서원의 이름으로 짓고 추모하고 강학하는 곳으로 삼았다. 선왕의 법을 살피자면 공이 있는 자는 제사를 지내고 죽음으로 섬기는 자도 제사를 지낸다. 대개 정공 부자는 태조 개국에 찬성(贊成)이었고 문종 때 고명대신(顧命大臣)이었다. 고명대신(顧命大臣) : 임금의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받은 대신.
 아버지는 국가의 법을 정하는 것을 도와 조정에 상법(常法)이 있게 하고 장례법을 반포하니 백성들이 옛 법도를 따랐다. 아들은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여 왕의 은택이 그치지 않게 하였고 어린 군주를 보호하여 큰 절의를 빼앗기지 않고 공을 세우고 충성을 다하였다. 이 모든 것이 제사를 받는 법도에 합당하다. 나라를 경영하고 기강을 세우는 도가 되니 제왕은 포상을 하고 사림(士林)은 종주로 삼아 영원토록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나라에서 서원을 철폐하였지만 제사의 법칙은 때에 맞게 바르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아래에서 등질 수 없는 의리이니 만약 법과 예의와 충성과 의리를 어찌 하루인들 그만둘 수 있겠는가. 전예(典禮)와 충의(忠義)의 도가 밝지도 않고 행해지지도 않는다면 오랑캐가 중화의 문명을 어지럽히고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게 될 것이니 어찌 큰 재앙을 면하겠는가. 또한 후학이 선현을 위한다면 그 살던 땅이 황폐해지고 그 먹던 샘물을 묻어버리는 일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후손이 선조에 대해서 이겠는가. 문정공은 일찍이 창원의 월영대에 유람하며 감상하였고 충장공도 삼남(三南)지역을 두루 유람하였다. 구암은 월영대의 상류이다. 창원은 삼남 중의 한 고을이다. 후손이 대대로 구암에 두루 살아 이곳에 서원을 짓고 정자를 지어 두 공의 영령을 모시고 돌보며 제사를 받드는 예를 행하였다. 후손들이 그곳이 황폐해지는 것을 그냥 보지 못하고 재계하고 추모하니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정씨들은 모두 순리를 따르는 예의와 사양의 풍모가 있으니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군자의 문에 들어섰음이고, 더욱이 하늘에서 내린 본성을 지키는 성명(性命)의 이치를 깨달음이 있으니 다만 그 재실이 빛날 뿐만 아니라 선조를 잊지 않음을 알겠도다. 그들의 말은 반드시 밝고 분명하니 예의를 강학함이 끊이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스스로 부지런히 힘쓰니 충효를 행함에 잠시도 떨어지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다. 선왕조(先王朝)의 순수한 백성임을 잃지 않으니 이 모든 것을 행하는 자들이 두 공(公)의 자손들이다. 그 재실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한 사람들은 규린(奎璘)과 우석(禹錫) 용석(庸錫) 창석(彰錫) 이다. 관석(瓘錫)을 나에게 보내서 기문을 청했고 이것을 한 분은 우리 간옹(艮翁) 선생이시다.

갑술(甲戌,1934)[알봉(閼逢;甲) 엄무(閹茂;戌)] 중하일 수양(首陽) 오진영(吳震泳) 기록하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 : 한말의 유학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 아버지 기선(驥善)과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충청북도 진천(鎭川) 외가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전우(田愚)를 처음 만난 후 스승으로 섬겨 호서지역의 대표적 전우 문인이 되었다. 그는 27세 때 동학도(東學徒)에 붙잡혀 고문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았고, 일제 말기인 71세 때 형사에게 체포되자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항거하할 만큼 자신의 기절을 지켰다. 1905년 그는 일본의 불의(不義)를 규탄하는 〈포고천하문 布告天下文〉을 지었고, 일본이 국가간의 공법(公法)을 어긴 죄를 문책해 각 국 공관(公館)에 호소하는 글을 지었다. 그는 〈기분 記憤〉을 지어 3.1운동때 일제(日帝)의 잔인함에 울분을 기록하였다. 또한 조긍섭(曺兢燮)의 〈복변 服辨〉에서 망국(亡國)의 임금인 고종(高宗)을 위한 상복을 거부하자, 그는 조긍섭의 입장을 반박하는 〈변복변 辨服辨〉을 지어 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유교를 비난하는 주장에 맞서 유교전통을 수호하는데 힘썼다. 1920년 권덕규(權德奎)가 동아일보에 글을 실어 공자와 함께 유림의 부패된 의식을 비판하자 〈경고세계문 敬告世界文〉을 지어 항의하고, 1931년 이인(李仁)이 공자를 비난하는 글을 싣자 동료 문인들과 함께 적극적인 성토에 나섰다. 스승의 문집인 ≪간재사고 艮齋私稿≫의 간행을 추진하다가 문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전우의 행장(行狀)을 짓는 등, 스승을 높이고 학통을 수립하는 데 진력하였다. 1944년 음성(陰城) 망화재(望華齋)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문인들이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하였다.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정이오(鄭以吾) : 1347년 정해년(丁亥年)∼1434(88歲, 세종16). 자(字)는 수가(粹可)이고, 호(號)는 교은(郊隱)이며, 시(諡)는 문정(文定)이다. 충목왕(忠穆王)1347년 정해년(丁亥年)에 진주(晉州) 비봉산하(飛鳳山下) 본댁(本宅)에서 생(生)하였다.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조선에 들어 예문관직제학(藝文官直提學)과 성균사성(成均司成)과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과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을 역임(歷任)하고, 세종(世宗) 을해(乙亥)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總制府事)로서 치사(致仕)하였다. 사서절요(四書切要)를 찬진(撰進)하였고, 태종(太宗)때 하윤(河崙)과 변계량(卞季良)과 더불어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찬(撰)하였고, 세종(世宗)때 장일통요(葬日通要)를 찬진(撰進)하여 선왕(先王)의 예(禮)를 밝혔다. 1413년에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이 되어 지공거(知貢擧)를 겸(兼)했으며,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문정(文定)이며 문집(文集)으로 ‘교은집(郊隱集)’이 있다.


정분(鄭苯) : 1394-1454(단종2년) 본관은 진주, 호는 애일당(愛日堂), 대제학 정이오의 아들이다. 태종16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로 합격, 1444년 예조참판, 호조판서가 되었다. 1447년 좌참찬으로 숭례문(崇禮門) 공사를 감독하였다. 문종1년(1451)에 김종서 황보인과 더불어 어린 세자의 보호를 부탁받았다. 단종 즉위년에 김종서의 추천으로 영의정이 되었다. 단종1년 세조의 찬탈로 김종서 황보인이 주살되자 정분도 낙안에 안치되었다가 그 뒤 1454년에 사사되었다. 영조 22년에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되었고 정조 10년(1786)에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다시 1791년에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