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곡서원(斗谷書院)은 창원시 마산회원구 두곡길 54(두척동 637번지)에 위치했으며, 헌종12년(1864)에 창건하였고, 고종4년(1867)에 이건(移建)한 문창후 고운 최치원(文昌侯 孤雲 崔致遠)을 배향하는 곳이다.
34개의 계단을 오르면 두곡서원의 입구인 경앙문(景仰門 : 덕망이 높을 사람을 위해 우러러 보라)을 만난다. 바라보는 방향의 경앙문 우측이 열려 있어 두곡서원의 강당을 보게 되는데 요즘 지은 건물임을 알게 된다.
<2013/3/2 두곡서원 모습>
최치원선생이 가야산(伽倻山)에서 선화(仙化)하기 전까지 우리지역 인근에 많은 흔적을 남겼으니, 진해구의 청용대각석(靑龍臺刻石), 합포구의 월영대(月影臺)와 돝섬(楮島)의 전설 등이 그것들이다.
두곡서원이 있는 두척동은 마을 앞으로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마을이 숨어 있는 듯 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두척교를 지나 마을로 접어들면 옛 모습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을을 지나는 작은 도로는 옛 길의 정서를 담고 있어 옛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우측으로 가면 두곡강당(斗谷講堂)과 문창공원허(文昌公院墟)라는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문창공원허’라는 비석 아래에는 고종 무진년(高宗 戊辰 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월영서당’을 두곡촌으로 이건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비는 마산합포구 월영동 471번지 경남대학교 경내에 있던 것을 1988년 7월 8일에 이전 해 왔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두곡서원 뒤편에는 ‘문창후최선생영당(文昌侯崔先生影堂)’이 건립되어 있지만 문이 잠겨있어 담장 밖에서 촬영을 했다.
최고운치원선생조선명신록기(崔孤雲致遠先生朝鮮名臣錄記)에는 『선생의 휘는 치원(致遠)이요 호는 고운(孤雲)이다. 신라왕경 사량부인(新羅王京 沙梁部人)이다. 8세손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러 비로소 경주를 관향(貫鄕)으로 하였다. 12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학구(學究)에 전심(專心)하여 희종(僖宗)의 건부원년(乾符元年)에 등과(登科)하였으며 황소(黃巢)가 반란(叛亂)을 일으키니 고변(高騈)이 제도행영 병마도통(諸道行營 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토벌(討伐)할 새 선생이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하여 기초한 격문(檄文) 한통으로 황소(黃巢)를 자진(自盡)케 했다고 한다.
동국(東國)으로 돌아와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배명(拜命) 받았으나 간신배(奸臣輩)의 시기(猜忌)로 용납(容納)되지 못하고 시사(時事)가 일비(日非)함을 보고 벼슬할 생각(生覺)이 없어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산수간(山水間)에 소요(逍遙)하면서 서사(書史)를 베개 삼고 풍월을 읊으시다가 졸(卒)하였다. 혹은 선화(仙化)하였다고 전(傳)하여지기도 한다. 동방의 문장이 공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당서 예문지(唐書 藝文志)에 공의 46집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과 문집이 30권이라는 기록이 있다.
려조(麗朝)의 계림 황업(鷄林 黃業)은 곡령청송지어(鵠嶺靑松之語)에 종사문묘(從祀文廟)라 했으며 시(詩)에 이르기를 “동국화국동 호중별유천(東國花國洞 壺中別有天 : 동국의 화개동에는 항아리 안쪽 같은 별천지가 있다네) 선인추옥침 신세숙천년(仙人推玉枕 身世倏千年 : 선인들 옥침을 다지고 몸 붙인 세상 천년이 잠깐일세) 만학우성기 천봉우색신(萬壑雨聲起 千峰雨色新 : 만학에서 우뢰소리 일어나고 일천봉우리 비 내려 만물에 새로워라) 산승망세월 유기엽간춘(山僧忘歲月 猶記葉間春 : 산사의 스님들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오히려 나뭇잎 사이에 봄을 기억하네) 간월초생처 송풍불동시(澗月初生處 松風不動時 : 시냇가로 달 떠오르는 곳에 솔바람은 움직이지 않고) 자규성입이 현흥자응지(子規聲入耳 幼興自應知 : 자규새 우는 소리 들려오니 그윽한 흥취 스스로 알레라)”』
최치원선생 관련 시
가일문창입비만(何日文昌入此巒) 최치원선생께서 언제 이산에 들어왔던가 ?
백운황학묘연간(白雲黃鶴渺然間) 흰 구름과 황학이 아득히 어우러진 때였도다.
기장류수홍진세(己將流水紅塵洗) 이미 흐르는 물로써 세상의 때를 씻었으니
불필중농만농산(不必重聾萬聾山) 만겹 산으로 다시 귀 막을 필요는 없으리라.
청산맹약시(靑山盟約詩)
승호막도청산호(僧乎莫道靑山好) 중아 산 좋다 말씀 마라
산호하사갱출산(山好何事更出山) 산이 좋다면서 왜 다시 나오나
시간타일오종적(試看他日吾踪跡) 뒷날에 내 자취 시험해 보라
일입청산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 한 번 들면 다시는 오지 않으려니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狂噴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물살이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뿜어 나와.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말소리를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속세의 시비 소리가 혹시라도 귀에 이를까 봐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롱산)-흐르는 물로 하여금 산을 에워싸게 한 것이리라.
斗谷影堂記
我國 國於海在 檀厖而箕晰 疇敎敍而有仁賢之化 降自三韓灑以來 干戈日尋世難極矣 而至於文學 則寥無聞矣 羅季眞聖王時 有文昌公 崔海雲先生者記 自兒小時 風表灑落 才思超逸 年甫十二 入中國以高某官 騈從事官製一檄掃黃巢亂 登中朝某官 文章動天下及還東土東土 狹隘 不足以展其蘊抱 乃日 人間要路通津 眼無開處 物外靑山綠水 夢有歸時 終無仕進之意 托跡於山水之間 文昌月影臺 實先甥杖屨之所 而千載如昨 尙帶遺芬 退陶先生所詠 至今猶有高臺月留得 精神向我傳 者是也州人立廟 而楬眞像以俎豆之 戊辰撤院之後 移安影幀于雲仍所居斗谷里 而歲月寢久 綃本糜缺將盡遠孫大柱惟是之懼齋鄕省間通文將立影堂庚子春 先構齋舍 以爲臨時 權安之所而今夏 聞眞影 又在河東鄕校 大柱乃跋涉炎程 賚畵師繪摹而來 爲先奉安于齋 因訪余于 花山之第 要一言以記之 余惟大柱 尊賢追先之誠 誠勤矣 但詘於力 未畢志願 殊若可恨 然一此心以往絡豈無攸遂也 姑書此以歸之 而其餘顚末大槪 待他竣事而更記之
金萬鉉 撰
두곡영당기(斗谷影堂記)
우리나라는 바다 동쪽에 나라를 세워 단군은 순후하였고 기자는 밝아 홍범구주(洪範九疇)로 질서를 가르치니 어질고 현명한 교화가 있었다. 삼한(三韓)에서부터 고구려 백제 이래로 전쟁이 날마다 이어져 세상이 지극히 어지러웠다.
문학에 있어서도 적막하여 이름난 자가 없었다. 신라 말 진성왕(眞聖王) 때 문창공(文昌公) 최해운(崔海雲) 선생이 일어나 어려서부터 기풍과 기골이 맑고 재능과 생각이 뛰어나 나이 열둘에 중국으로 들어가 고모(高某)의 從事官으로 벼슬하여 황소(黃巢)의 난을 격문 한편으로 평정하여 중국 조정에 벼슬을 하고 문장으로 천하에 울렸다. 우리나라로 돌아오니 나라는 좁아서 그 쌓아놓은 것을 펼치기에 부족하였다. “인생에서 나루로 통하는 중요한 길이 눈에 보이는 곳이 없으니 세상 밖 청산녹수(靑山綠水)로 꿈속에서나마 돌아갈 때이다.”하고 끝내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고 그 자취를 산수(山水)에 남기며 유람하였다. 문창(文昌) 월영대(月影臺)는 실로 선생께서 행적을 남기신 곳이다.
천년의 세월이 어제와 같아 오히려 그 남겨진 향기가 남은 듯하고 퇴계(退溪) 도산(陶山) 선생이 시를 읊었다. 지금 오히려 높은 대(臺)에 달이 남아 있어 그 정신이 나를 향해 전해진다는 것이 이것이다. 고을 사람들이 묘우(廟宇)를 세워 그 진영(眞影)을 걸고 제사를 드렸다. 무진년 서원을 철폐한 뒤 그 후손들이 두곡리(斗谷里)에 그 영정을 편히 모시고 세월이 오래 지나 본래의 자손과 그 모습이 점차 흩어져 사라지게 되었다. 먼 후손인 대주(大柱)가 이를 두려워하여 시골과 도시에 통문을 돌려 장차 영당(影堂)을 세우려 하였다.
경자년 봄에 먼저 재실을 갖추고 임시로 영령을 모시는 장소로 삼고 올해 여름에 진영(眞影)이 하동향교(河東鄕校)에 있다는 말을 듣고 대주가 멀고 험한 길을 여행해 화공(畵工)에게 부탁하여 그대로 베껴서 돌아와 우선에 재실에 봉안하였다. 이에 화산(花山)의 집으로 나를 방문하여 한마디 기문(記文)을 적어주기를 청하였다. 내 생각에 대주(大柱)가 현인을 존경하고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을 생각하니 진실로 감동이 되었다. 다만 힘이 모자라 그 원했던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할 것이나 이 한 가지 마음으로 이왕 나아갔으니 어찌 끝내 이루는바가 없으리오. 이에 이것을 글로 써서 그에 부치니 그 나머지 일의 시작과 끝의 대략은 다음에 하던 일을 성취하기를 기다려 다시 기문을 쓸 것이다.
김현만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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