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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서원은 창계 서응시를 기리는 곳

천부인권 2013. 4. 16. 06:30


<2013/3/2 증산서원 입구 풍경>


회원구 내서읍 원계증산길 57-11(원계리 523번지)에 창건된 증산서원(甑山書院)은 충열공 창계 서응시(忠烈公 昌溪 徐應時 ; 1531)을 배향하는 곳으로 6·25사변으로 소실된 것을 1953년에 다시 복원하여 대지 200평에 건평 60평으로 세운 목조와가(木造瓦家)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해 강당이 파손되자 그해 11월에 복원하였다. 강당은 4, 별묘 3, 고사 3칸으로 구성하였고 매년 음력 삼월 초팔일에 유림들과 함께 향례(享禮)를 올리고 있다.




창계 서응시(昌溪 徐應時公)의 스승은 중봉 조헌선생(重峯 趙憲先生)으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상소했으나 조정 신료들에 의해 묵살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조직하였고 이때 공이 참모역할을 하다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를 하여 사적 제105호인 칠백의총에 안치 되었다.



<증산서원 강당의 모습>



<강당 뒤편의 숭절사>





증산서원중수기(甑山書院重修記)

무학산(舞鶴山)이 우뚝 솟아 천수에 푸르러고 광려천(匡廬川)이 출렁출렁 만세(萬世)토록 맑구나.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서릿발 같은 절의(節義)는 완연히 만고(萬古)의 달빛처럼 맑구나. 상서(祥瑞)로운 빛과 구름서리고 아름다운 기운이 엉킨 버들엔 내낀 천가의 새벽이요. 꽃바람 부는 온천하의 봄이로구나. 이 땅에 산이 푸르고 물 맑은 내서의 원계리(元溪里)가 있으니, 달성서씨(達成徐氏) 현감공파(縣監公派) 후손이 죽음으로 의()를 지킨 창계공(昌溪公) 응시(應時)가 대대로 세거(世居)해온 땅이다. 고려 때 봉익대부 판도판서 달성군 휘 진(奉翊大夫 版圖判書 達成君 諱 晋)이 시조이며, 구계선생(龜溪先生)5대손(5代孫)이다. 창계공은 1531년(중종 신묘)에 태어나 중봉 조헌선생(重峯 趙憲先生)의 문인으로 율곡선생의 이론을 따랐으며, 스승이 귀양을 갈 때 의자를 메고 조선생의 뒤를 따르는 등 10년을 하루 같이 모셨다. 선조 24(1591)에 왜국사신(倭國使臣)인 승려 현소(玄蘇)와 유천(柳川) 등이 부산항에 입항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조중봉선생이 도끼를 들고 궁전 앞에 엎드려서 임금에게 왜구사신 처단을 상소하고 왜국군(倭國軍)이 침략할 것이니 그들의 침범에 대비하기를 주장하였으나, 묵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임진년(1592)에 사상미증유(史上未曾有)의 칠치난(漆齒亂)이 돌발하여 섬오랑케 20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 근역 호산을 짓밟으니 조국은 시체의 산과 피의 내를 이루었다. 이때 조중봉선생은 분()을 참지 못하여 창의(倡義)하니 창계공은 스승을 따라 나서 기허대사군과 합세하여 적을 쳐서 청주를 수복(收復)하는공을 세웠다. 임진년 818일에 이르러 왜적 고바야가와다까가게의 대군을 금산 경양대(錦山 景陽臺) 아래에서 만나 분전(奮戰)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適)으로 모든 의사(義士)들이 조선생을 따라서 북녘을 바라보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700의사(義士)와 함께 하늘을 가리키고 땅에 그리면서 나라와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안전을 기원하면서 충의정신으로 700의사(義士)가 목숨을 던지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랴. 금산에 있는 칠백의총이라는 무덤은 사적 제105호로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친 조중봉선생과 기허영구대사 휘하(麾下) 칠백의사의 유골봉안 묘소다. 창계공(昌溪公)은 조중봉선생의 참모로 칠백의사 중 한 영령(英靈)이다. 충장공(忠莊公) 유림(柳琳)이 인조16(1638)에 삼가 순절비(殉節碑)와 종용사(從容祠)를 창건하여 해마다 음력 818일에 칠백의사의 정충의절(貞忠儀節)을 추도(追悼) 찬앙(讚仰)한즉 단말마적(斷末魔的) 일제(日帝)가 최후 발악으로 문득 금산 순의비(殉義碑)와 가야산 해인사 송운비(伽倻山 海印寺 松雲碑)를 파괴하고 말았으나 미구(未久)에 왜적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여 조국광복이 되자 지방관민이 정성과 공경심을 바쳐 순의비와 종용사를 복원건립하니 칠백의총(七百義塚) 위의 달빛과 함께 만고에 길이 멸()하지 않으리라. 숙종13(肅宗 1687)에 추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시(追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諡)는 충열(忠烈)이라 하였다. 고종3(1866)에 광려 증봉(匡廬 甑峯)의 북쪽 두산(斗山) 아래 원계(元溪) 위에 재사(齋舍)를 이건하였는데 그때 주손 진우(冑孫 鎭祐)가 정성을 다하였다. 1950년에 6·25동란이 발발하였을 때 재사건물(齋舍建物)이 모두 불타 버렸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으랴. 1953년에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고 공경(恭敬)함을 바쳐 복원중건(復元重建)하였다. 이때 사림의 공의(公議)를 얻어 재사(齋舍)에서 서원(書院)으로 승격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20035월에 갑자기 폭풍우의 재난을 입어 서원강당이 크게 파괴되고 사우(祠宇)와 대문만 다행히 재해를 면하였다. 이에 동년 강당을 중건하여 20031125일에 입주상량(立柱上樑)하였고, 20042월에 준역(竣役)하니 기쁘지 않으랴. 일전(日前)에 공의 후손 장수(長洙) 정보(正保) 인근(仁根)보(甫)가 와옥을 내방(來訪)하여 저에게 증산서원 중수기(重修記)를 위촉하므로 아는 것도 적고 불문(不文)이긴 하나 이 기문(記文)을 짓는다. 한 뿌리 천 송이로 핀 후윤(後胤)들은 창계공(昌溪公)의 인간상도의 교훈과 의절(義節)을 천명함으로써 힘차게 매진하며 친목하고 나태하지 않으며 바라건대 효도하고 충신하며 조상을 숭배하고 어진이를 존경하며 이익 앞엔 정의 그리며 형제간에 우애 깊고 생명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는 사도(士道)를 선양하기를 비옵나이다. 여기에 큰 이름은 적지 않고 길이길이 변함없고 나라 위해 생명 받친 능상절의 저 양귀비꽃 보다 붉은 마음 그 단심(丹心)은 저 한청상(汗靑上)에 길이 빛나리라. 이로써 애오라지 기문으로 삼을 뿐이다.
단기(檀紀) 4337년 갑신(甲申) 4월 18일
경북대학교 명예교수(慶北大學校 名譽敎授)
문학박사(文學博士) 서수생(徐首生) 삼가 쓰다.


甑山書院重修記

舞鶴巍巍千古碧 匡廬汨汨萬年淸 舍魚取熊傲霜節 百世宛如蟾魄祥 光郁靄佳氣葱蘢 烟柳 千家曉風花百里 春玆土有山紫水明 內西元溪里迺卽 達城徐氏縣監公派 後胤取熊義士 諱應時號昌溪公之 奕世世居地也 鵠嶺奉翊大夫版圖判書達城君諱晋 爲肇祖龜溪先生五代孫也 昌溪公中宗辛卯生(一五三一年) 從遊重峯趙憲先生門讚究于氣發理乘設竄謫之日 公擔椅子隨 後十載如一日 宣祖辛卯年 倭國使臣僧玄蘇柳川 入釜山港 重峯先生 持斧伏闕前上疏于 倭使處斷主倡 倭之侵掠對備 官不容納矣然 而翌年宣祖壬辰突發 史上未曾有之 漆齒亂島夷二十萬 渡海蹂躪於 槿域能化屍山血河 趙重峯先生奮起倡義 昌溪公從師 便合騎虛擊敵迺 收復淸州樹功矣至 八月十八日也 遂將遇倭敵小早川隆景大軍于 錦山景陽臺下奮戰 以衆寡不敵 從先生望北泣血 與七百義士指天畵地 祈願社稷 白民之安全 以忠義殉國 胡不聖哉諶是 七百義塜者錦山所在 以史蹟百五號 忠國取熊士趙重峯先生 與騎虛大師麾下 七百義士之遺骸奉安墓所 昌溪公重峯先生之參謀 七百義士中一英靈也 忠莊公柳琳仁祖戊寅(一六三八) 謹竪殉義碑 與創建從容祠 年年歲歲八月十八日 追悼讚仰厥 貞忠義節 則斷未魔的 日帝輒破殉義碑 曁松雲碑未久倭帝敗戰 迨祖國光復也 地方官民 竭誠盡敬復元竪碑祠塚上 與月萬古長不滅 肅宗丁卯 贈資憲大夫吏曹判書諡忠烈 高宗丙寅 匡廬甑峯之 北斗山下元溪上移建齋閣 胄孫鎭祐殫誠 大韓民國 庚寅突發 六二五動亂 辰全燒燬盍心痛 癸巳後胤絜誠展敬復元 重建爰得士林公議從 此齋舍迺昇書院 闔說哉癸未五月 我被颶風雨之災 大破講堂 而祠宇曁大門免災幸矣迺重修 講堂十一月념五日立 主上樑甲申二月竣役 奚不說哉不日前公之後裔長洙 正保仁根甫 來訪蝸廬囑俺重修記謏識不文 而撰之焉一根千朶公之後胤 以闡昌溪公彛訓 義節贔屭亹和不倦庶 冀禱于孝悌忠信 崇祖尊賢 見利思義 塤篪雅奏 舍生取義之士道喧楊也 曰若哦厥大名 不朽長無 古殉節丹心照汗靑是 以聊以爲記文而耳

檀紀 四三三七年 甲申 四月 十八日

慶北大學校名譽敎授文學博士 徐首生 謹撰


[출처 및 참고]

증산서원지(2014)-증산서원




<원계마을의 당산나무>



<원계마을 담장 풍경 수 백년은 됨직한 담쟁이넝굴이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