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첨두서원에 가면 정병산(精兵山)이 보인다.

천부인권 2013. 4. 20. 08:28

 

2013/3/2 첨두서원 입구

 

첨두서원(瞻斗書院)은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삼계로 63(삼계리 589번지)에 위치하며, 영조7(1731)에 창건되었으나 고종 때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47년에 복원하였고, 1950년에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광복 을미(光復 乙未 1955)년에 재건되었다.

 

 

첨두서원를 찾아 내서로 가면 4차선도로 변 도시 한 가운데에 네비게이션이 안내를 마친다. 첨두서원 입구에 있는 철물점에서 이곳을 관리하고 있어 양해를 구해 서원 안까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서원 입구 외삼문인 공북문[拱北門 : 모든 별이 북극성(北極星)으로 향하는 것과 같이 사방(四方)의 백성들이 천자(天子)의 덕화(德化)에 귀의(歸依)하는 것] 앞에는 교하노씨양현세거비(交河盧氏兩賢世居碑)’가 있는데 이 비의 내용 중에는 노경종이 11세 때 어른을 따라 산에 올랐다가 산 이름을 묻고, ‘정병(精兵)이 있는 곳에 대장(大將)이 없을 수 있느냐, 즉석(卽席)에서 지었다는 망정병산(望精兵山)의 내용인해국(海國)에 정병(精兵)이 출국하니 남만(南蠻)이 감()히 침략(侵掠)하지 못하네. 대장(大將)이 응당(應當) 여기에 있으니 우뚝함이 몇 천 길이나 되느냐라고 새겨져 있다.

 

또한 창원군지(1962) 하권 비지(碑誌) p81에는 허전(許傳, 1797~1886)이 지은 첨지중추부사노경종묘갈명(僉知中樞府使盧景宗墓碣銘)’이 기록되어 있는데 묘갈명의 내용 중에는

「년방십일 종장자상태백산 망견정병산 문왈 대장산안재 즉부시왈 '해국정병출 남만불감침 장군응재비 특립기천심'(年方十一 從長者上太白山 望見精兵山 問曰 大將山安在 卽賦詩曰 海國精兵出 南蠻不敢侵 將軍應在比 特立幾千尋’)

이라고 적혀 있다.

이 내용 역시 세거비世居碑의 내용과 일치하는데 「방년11세에 어른들을 따라 태백산[현재 명곡동 뒤산은 태복산이라 하는데 옛 이름은 태백산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이곳에 오르면 정병산이 보인다.]에 올라 정병산을 바라보며 산 이름을 물었다. 정병들이 있는데 대장산은 어디에 있는가?라며 즉석에서 시를 지으니,

해국의 정병이 출병하니

남쪽의 오랑케 감히 침략하지 못한다.

장군의 응답應答이 여기 있으니

우뚝 섬이 몇천을 묻겠는가.

 

 

 

 

 

교하노씨(交河盧氏)의 첨두재(瞻斗齋)는 노정직(盧廷直)을 주향으로 삼고, 5대손 명암 노경종(明庵 盧景宗 1555 ∼ 1625)을 종향으로 봉안하여 채례(采禮)를 지내던 것을 1981년 유림(儒林)의 공의(公義)를 얻어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매년 음력 4월 초일일에 향례를 올리고 있다. 지금의 첨두서원(瞻斗書院)2001년 도시계획으로 구 건물은 없어지고 신축을 한 것이다.

 

 

 

김종하의 창원군지(1962) 하권 비지(碑誌) p78에는 봉사자 위(奉祀子 暐)가 쓴 홍문관교리 겸 지제고 노정직묘지(弘文館 校理 兼 知製誥 盧廷直墓誌)’에는 정통(正統) 9(1444) 12월 명곡 감산(坎山) 언덕에 안장했다. 함안조씨에 장가들어 23녀를 두었다. 아버지는 사복시정 노사충(盧思忠)이요, 할아버지는 중현대부 선공령 노영(盧永), 증조는 봉익대부 예의총랑 노천허(盧天許)이다. 외조는 정순대부 판군기시 박문본이니 본관이 울산이다. 아내는 조씨이니 봉훈랑 영산현감 조길화의 따님으로 본관은 함안이다.”로 기록되어 있다.

 

노경종(盧景宗)은 상남면 지귀동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초계전투(草溪戰鬪)에서 큰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는데, 창원에 돌아와서도 소모장(召募將) 이정(李瀞)의 참모가 되어 공을 세운 뒤 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정유재란 때도 많은 왜적을 베어 훈련원정에 제수되었으며, 나중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올랐다. 그는 시문(詩文)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11세에 이미 망정병산(望精兵山)을 지었고, 등월영대(登月影臺)등 많은 시를 남겼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적성현감을 지낸 노온(盧溫) 또한 이 집안을 빛낸 사람으로 기록된다.

옛 창원군 상남면 명곡리 일대에 세거했던 교하노씨는 그 이 후 명곡 외에 서곡(西谷지귀(知歸봉림(鳳林) 등으로 퍼져 살게 되었다. 이들 마을은 1980년 이 후 창원시의 도시 계획에 따라 인근 지역으로 이거하게 되는데, 오늘날 명서동·봉림동 등에 여전히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출처 : 창원-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

 

 

문학박사학술연구회원단국대학교석좌교수진성이가원근찬(文學博士學術硏究會員檀國大學校碩座敎授眞城李家源謹撰)한 첨두서원중건기(瞻斗書院重建記)에는 이렇게 적었다.

옛 창원부 내서면 삼계리(昌原府 內西面 三溪里)는 교하노씨(交河盧氏)의 세거지며 첨두서원이 있으니 이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벼슬을 지낸 휘 경종(景宗) 호 명암공(明庵公)이 풍월을 읊던 곳이다. 근자(近者)에 서원으로 승격(昇格)하고 공의 5대조(五代祖) 홍문관 교리 겸 지제교(弘文館 校理 兼 知製敎) 휘 정직공(廷直公)을 주향으로 하고 공을 배향(配享)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교리공은 단종이 왕위를 물려줄 즈음에 슬픈 마음으로 벼슬을 버리고 문창(文昌) 남쪽에 은거(隱居)하면서 망복(罔僕: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의 뜻을 간직한 채 백산재(白山齋)를 지어 놓고 시문을 읽으며 여생을 즐기셨는데 그 후 백산재는 그 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이용되었으나 먼 훗날 화변(火變)을 당한 후 복원하지 못했으니 사림들의 개탄(慨歎)과 현손(賢孫)들의 깊은 한이야 말하지 않아도 짐작(斟酌)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후 영특한 5대손 명암공이 나시어 일찍이 가학(家學)을 익히고 지산 조호분선생(芝山 曺好盆先生) 문하에 나아가 경전과 사서를 두루 섭렵(涉獵)하시고 분발(奮發)하여 청운(靑雲)의 뜻을 이루어 임금은 요순과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 백성은 태평성세를 누리게 하려 했으나 그 큰 뜻을 펴볼 겨를도 없이 임진난(壬辰亂)을 당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켜 창생을 구제(救濟)하기에 전념(專念)하셨으니 씩씩한 절의와 뛰어난 위풍으로 원근에 명성이 대단하여 싸울 때마다 공을 세우니 초유사(招諭使: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와 체제사(體祭使)가 번갈아 칭찬(稱讚)의 글을 보내주고 조정에서는 품계를 더 높여 주었으며 평난(平亂) 후에는 선무이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문무의 양면으로 훌륭한 명성이 있었으나 그 후 나라의 운이 그릇되어 영창군(永昌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끝내 발륜(發倫)의 조짐(兆朕)이 보이자 공은 바로 이상(履霜)의 경계(警戒)를 감지하시고 호연(浩然)히 뜻을 정하여 고향에 돌아와 백산 아래 집을 지어 첨두재(瞻斗齋)라 현판(懸板)하고 향읍(鄕邑)의 유생을 모아 학문을 전수하고 풍류를 즐겼으니 한편으로는 사표(師表)요 한편으로는 은사가 되시어 삼경(三經)의 흥취와 삼락(三樂)의 도를 즐긴 뜻은 옛 군자와 다를 바 없으니 어찌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히 생각 했겠으며 세상에 은둔(隱遁)한다고 번민(煩悶)하였겠는가? 봄이면 봄을 즐기고 밤이면 달을 즐기면서 티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오래사시다 세상을 뜨셨으니 주역에서 말한 군자선종(君子善終)이 바로 이런 분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께서 몰세(沒世) 하시자 사림과 후손들이 이집을 서당으로 이용하여 책 읽는 소리와 공부하는 사람들이 해가 지날수록 불어나고 봄가을 제향 때에 할아버지가 주향이 되고 손자가 종향이 되어 할아버지로서 자애를 더할 수 있고 손자로서 효도를 더할 수 있으니 영원토록 칭찬받을 일 아니겠는가? 집이 세워진 후 세상이 여러번 바뀌어 국법으로 훼철(毁撤)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시운의 소치(所致)였으나 자손들의 한스러움이야 얼마나 긴 세월이었던가? 천도가 회복되어 광복 후 계사년에 중건하였으며, 재를 서원으로 승격하였으니 규범이 갖추어졌고 화려(華麗) 했으나 오래가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었던가? 작년(昨年) 기묘(己卯)에 서원의 경내(境內)가 도시계획에 편입되어 서원을 헐고 새로 짓게 되었으니 이 역시(亦是) 운수였으나 서원의 크기와 규모의 정교(精巧)함이 전보다 더 낫게 되었으니 후소지사(後笑之事)가 아닌가? 공사를 마친 다음 명성 있는 자손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인 승덕씨(昇德氏)가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付託)하니 내 늙고 병중이라 해서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기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