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시 사화동 밀양박씨 운암서원 雲巖書院 - 효자 박신윤을 배향하는 곳.

천부인권 2013. 4. 25. 00:06

 



 

2013424(음력 315) 운암서원 경현사 향례집사(雲巖書院 敬賢祠 享禮執事)로 초헌관 창원부시장(初獻官 昌原富市長) 조영파(曺永波), 아헌관(亞獻官) 우세곤(禹世坤), 종헌관(終獻官) 남상구(南相玽), 직일(直日 : 제례 전반에 대하여 자문을 하는 사람)에는 박광욱(朴光昱)이 각각 선정되어 향례를 봉행했다.


 



창원시 의창구(義昌區) 사화동(沙火洞) 303번지에 위치한 운암서원(雲巖書院)은 숙종 28(1702)에 사당(祠堂)으로 건립되었다가 고종 8(1871)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고, 1876년에 중건되어 문중 재실로 사용되던 것을 1949년부터 석채(釋菜)를 봉행했다. 그 후 창원공단(昌原工團)의 조성으로 사화동(沙火洞) 및 사당(祠堂)이 철거되어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2001년에 착공하여 2003년 창원시 의창구 사화로 311에 지금 모습의 운암서원(雲巖書院)으로 복설(復設)하였다. 이때부터 종전처럼 우곡 박신윤(愚谷 朴身潤)을 단독 배향(配享)하지 않고 주벽(主壁)을 고려조에 판서를 지낸 송은 박익(松隱 朴翊)으로 하고, 송은의 중자(仲子)인 박소(朴昭), 인당의 5세손인 박홍정(朴弘貞)을 추가 매년 음력 315일로 향례일(享禮日)을 정하여 분향(焚香)하고 있다.




 

옛 창원대도호부는 지금의 창원시 보다 광범위한 지역으로 함안 칠원(漆原)의 일부도 포함하여 많은 서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각서원에 배향된 분들 중에 봄·가을 향사 때 국가에서 향()을 하사(下賜)하여 제사를 드리도록 하는 향현사(鄕賢祠)는 오로지 이곳 우곡 박신윤 공(愚谷 朴身潤 公)을 배향하는 운암서원 뿐이다.

 

 



 

우곡선생(愚谷先生)의 일화로 유명한 것은 이름이 없던 하천이 이름을 얻었으니 조갈내(早渴川)의 유래(由來)이다. 때는 조선 숙종 23(朝鮮 肅宗, 1697) 우곡선생께서 37세 되던 4월에 명곡리(明谷里)에 살던 적성현감(積城縣監)을 지낸 노온(盧溫)의 신성재(新成齋) 낙성설연(落成設宴)에 선생도 초대되어 사우들과 함께 참석하였으나 홀로 수저를 들지 않고 묵묵히 앉아있자 이를 이상히 여긴 노공(盧公)이 직접 술을 따르고 권하여도 먹지 않아 이유를 물어본 즉, “병석에 누워계신 노모(老母)을 생각하니 먹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이에 노공(盧公)특별히 노모(老母)에게 드릴 음식을 준비하여 놓았으니 염려하지 말고 드시라고 권하였다. 그제서야 음식을 먹었으나 얼마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기로 함으로 하인 2명을 수행하여 집으로 보내었다한다.


 




 

우곡선생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큰비가 내려 내()를 건널 수 없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탄식하기를 나의 불효한 죄를 하늘이 꾸짖어 죄를 준다.”며 통곡을 하자 말을 다하기 전에 냇물이 갈라지고 징검다리가 노출되어 무사히 내를 건너 집으로 갔다. 하인들이 돌아와 노공에게 이 사실을 말씀드리니 출천지재덕경지효야(出天之哉德卿之孝也), 감천재덕경지효(感天哉德卿之孝)라 하였다.



 

 

 

하천의 물이 갈라졌다고 조갈내(早渴川)”라 하였는데, 창원시 도시계획에 의해 두개의 하천을 하나로 합쳐지고 이름을 하남천(下南川)”이라 부르고 있다. 별 뜻이 없는 하남천이란 이름 대신 하늘도 감동시킨 역사와 효행(孝行)이 살아 있는 명칭인 조갈천(早渴川)으로 바꾸어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하는 것도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재령후인 이병희(載寧后人 李秉熙)가 근찬(謹撰)한 운암서원 복원기(雲巖書院 復元記)는 이처럼 적고 있다. [이병희 : 1937129일 생으로 의령 부림 신반에서 태어나고, 본관(本貫)은 재령 이씨이며, 95년 부산 성도고등학교장을 재직한 사람이다. 학력은 50년 용덕초교, 53년 신반중, 56년 남지고(3) 졸업, 64년 동아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85년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한국사 전공(교육학 석사)했다. 저서(著書)로는 신라불교의 전래와 영향’('63)이 있다. 남지 향토출신으로 호는 우거이다.]

 

 


운암서원 복원기(雲巖書院 復元記) 

창원향(昌原鄕)의 천주산(天柱山)은 하늘을 지탱(支撑)하듯 솟아 향()의 주산되고 산하(山下)에는 유구읍(有舊邑)하며 지맥(支脉)이 남주(南走)하여 돌올(突兀)한 독산(獨山)이 있으니 등명산(燈明山)이라 정취향양처(精聚向陽處 : 양지바른 곳에 마을을 이루었으니)에 유동(有洞) 왈 사화(沙火)이니 왕석(往昔) 조선초(朝鮮初)에 충숙공(忠肅公) 송은선생(松隱先生) 밀성박공지손(密城朴公之孫)인 휘 맹번(諱 孟蕃)이 자밀성(自密城)으로 이거우시(移居于是)하니 증위세장(曾爲世庄)이라. 수난기(受難期) 36년을 거쳐 광복20년에 국책으로 창원공단을 조성하니 사화 또한 기 영역(其 領域)이라 세장세적(世庄世蹟)이 철거되고 구획(區劃)에 따르게 되니 옛 모습은 일변(一變)하였지만 유유불변자(惟有不變者 : 생각하니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는 운암서원 구허(雲巖書院 舊墟).

서원자(書院者)는 위우곡선생휘신윤(爲愚谷先生諱身潤)으로 생어현묘조(生於顯廟朝)하여 몰우삼십팔세(歿于三十八歲)이나 5년후인 숙종이십팔녕(肅宗二十八年) 임오(壬午)에 사림(士林)이 입사(立祠)하고 헌종갑진일팔사사년(憲宗甲辰一八四四年)에 원()으로 승격(昇格)하면서 증호조좌랑(贈戶曹佐郞)이라 무진일팔육팔(戊辰一八六八)인 고종조(高宗朝)에 국령(國令)으로 철원(撤院)되었다. 이를 개탄(慨歎)한 문노호재능환(門老湖齋能煥)은 인의병자일팔칠육년(因議丙子一八七六年)에 기허(其墟)에 긍구서당(肯構書堂)하고 유계(儒契)로 우모(寓慕)하여 오다가 기축일구사구년(己丑一九四九年)부터 석채(釋菜)를 봉행(奉行)하여 왔으니 간단(間斷)없음이여 모현지단침(慕賢之丹忱)이라 복원(復元)을 목표(目標)하여 모의(謀議)하고 궁구(窮究)한 시월(時月)이 그 얼마이던가. 그 계책(計策)로 자금(資金)을 길굴(拮掘)해 오다가 종회(宗會)에 부의(附議)하니 문의(門議)가 귀일(歸一)이라. 신사(辛巳)2001년에 시역(始役)하였는데 도책(圖策)과 감역(監役)은 수인(數人)이 단()을 조성(造成)하여 현노(賢勞)하였는데 불과 수년(不過 數年)에 공고흘(公告訖)하니 수삼지층(數三地層)은 마석이축(磨石以築)하고 긍구긍당자(肯構肯當者) 총십동(總十棟)이라 당한 의용(儀容) 고박(古樸)한 제도(制度)는 서원으로서의 면모(面貌)를 구비(具備)하였다. 사우(祠宇)는 십척삼간(十尺三間)인데 수위신좌(首位神座)는 송은선생(松隱先生) 휘 익(諱 翊)인데 정생고려(挺生高麗)에 역사삼조(歷史三朝)요 관지판서(官至判書)라 려운장흘(麗運將訖)에 사관귀향(辭官歸鄕)하여 강복자정(岡僕自靖)하시고 오징불기(五徵不起)에 종내단침불이(終乃丹忱不貳)하니 려조충신(麗朝忠臣)으로 팔은지일(八隱之一)이시다차좌(次座)는 휘소(諱昭)이니 송은선생지중자(松隱先生之仲子)로 호(號)는 인당(忍堂)이며 포은문인(圃隱文人)이다.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셨을 때는 청백지조(淸白之操)와 인애지정(仁愛之情)이 백리위정(百里爲政)에 만구성비(萬口成碑)라 애연유일시(藹然有一時)하니 제우양후춘심(題于兩後春心)이라 차좌왈(次座曰) 휘 홍정(諱 弘貞)인데 인당지오세손(忍堂之五世孫)으로 호는 의와(義窩)다. 이부명(以父命)으로 유환경사(遊宦京師)에 조등무과(早登武科)라 당지임난()에 시직부호군()이라, 호종난가(扈從鑾駕)에 이상천리(履霜千里)라. 읍혈삼년(泣血三年)에 모인쟁사(冒刃爭死)하고 성공위대(成功爲大)라 어가환도(御駕還都)에 전임남도방수(轉任南道防守)라 갈력이혈유지민(竭力而孑遺之民)이라도 어육지환(魚肉之患)을 면(免)케 했다. 제사좌(第四座)는 휘 신윤 호 우곡(諱 身潤 號 愚谷)인데 의와지증손(義窩之曾孫)이다. 성재 허공(性齋 許公)은 기문(記文)에서 왈(曰) 운암서원은 우곡처사(愚谷處士)의 강도지지(講道之地)이기로 채령지소(采靈之所)라 하였고 또 기 학문(其 學問)은 근본(根本)을 사친경장(事親敬長)에 두었고 지신대요(持身大要)는 불기심 삼자(不欺心 三字)를 벗어남이 없다 했으며, 효도(孝道)를 다했으니 상금(尙今)도 이적(異蹟)이 구비(口碑)되어 전래(傳來)한다. 사왈(祠曰) 경현사(敬賢祠)이다. 사지전(祠之前) 동편(東便)에는 삼간(三間)의 우곡선생 별묘(愚谷先生 別廟)가 있고 서편(西便)에는 삼간(三間)의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사지정전층대하(祠之正前層臺下)에 오간(五間)의 강당(講堂)이 있으니 명하여 운암서원(雲巖書院)인데 향후(向後) 향사일(享祀日)에 일기(日氣)가 불순(不順)하면 후문(後門)을 열고 참배(參拜)할 수 있도록 배려(配慮)했다. 강당지전동(講堂之前東)에 삼간의 동재(東齋)가 있으니 왈 권선재(曰 勸善齋)요 서재(西齋)는 근학당(勤學當)이다. 서재(西齋) 계하(階下)에 다용도(多用途)의 삼간옥(三間屋)이 있고 기하(其下)에 관리사(管理舍)가 있으니 53평이며 내삼문(內三門)은 경덕문(景德門)이라 게액(揭額)했고 외삼문(外三門)은 정안문(靖安門)이라 했다. 희(噫)라 왕석갑진(往昔甲辰)에 유철원(有撤院) 령(令)하니 향방장보(鄕坊章甫)가 심석지(甚惜之)라, 금지복원(今至復元)은 유조선수통(有祖先垂統)에 찬단방후(儹斷放後)함이요. 대효 우곡선생(大孝 愚谷先生)은 기여유령(其如有靈)하여 기선 삼선생(其先 三先生)을 여시 봉안우동당(如侍 奉安于同堂)하니 서원명(書院名) 운암(雲巖)은 적가의(赤可矣)요. 황차(況且) 전고대방소재명야(典故大方所載名也)라. 갑신춘 정지일(甲申春 正之日)에 오우 박보 창대옹(吾友 朴甫 滄大翁)이 청문(請文)에 불문고사(不文固辭)나 불획(不獲)하고, 유동 유이십년지의(有同 遊二十年之義)라. 여우서언이위흘지(如右敍言而爲訖之)라.

서기 2004년 갑신(甲申) 청명절(淸明節)

재령후인 이병희(載寧后人 李秉熙) 근찬(謹撰 삼가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