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8호로 지정된 조순장군비(趙純將軍碑)는 함안군 가야읍 하검길 136-1(검암리 586-1)의 검암리 은하아파트 입구, 함안천 동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조순장군비(趙純將軍碑)라 명명하는 이 비는 고려말(高麗 末) ·조선초(朝鮮 初) 환관이었던 조순장군(?∼1398)의 지조(志操)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순(趙純)은 이성계(李成桂)와 위화도(威化島)까지 좌중군(左中軍)으로 출전(出戰)하였다가, 회군(回軍)하자 적극 반대(積極 反對)한 후 벼슬을 버리고 남하(南下)하여 함안 검암(儉岩)에 은신(隱身)하였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 조순(趙純)의 충성심(忠誠心)이 생각(生覺)나서 전국에 수배를 하여 찾은 후 수차(數次) 그에게 복직(復職)을 권하였으나 끝내 사양(辭讓)하므로, 복직(復職)하지 않으면 목을 베어오도록 하였더니, 조순(趙純)은 서슴치 않고 목을 내어 놓았다 한다. 이성계는 자기의 수하로 오지 않은 조순을 죽였지만 그의 올곧은 지조(志操)를 찬양(讚揚)하여 조순이 살던 집 앞에 이 비를 세워 하마비(下馬碑)의 구실을 하도록 했다.
조순장군비(趙純將軍碑)가 이곳 완천당 박선생 유허비각(浣川堂 朴先生 遺墟碑閣) 안에 옮겨 보존하게 된 것은 조순의 후예들이 인간의 구실을 하지 않고 이웃들을 못살게 굴어 집안이 기운 뒤 마을 사람들이 비를 훼손 하였다가 훗날 집 앞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완천당 박선생 유허비각(浣川堂 朴先生 遺墟碑閣)에 옮겨 두었다 한다.
조순장군비(趙純將軍碑)는 납작한 받침돌 위에 비를 세운 모습으로, 비의 윗변은 둥글게 다듬어 위패의 모습처럼 만들었다. 이런 형태의 간소한 비석은 조선시대에 많이 제작이 되었는데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위패의 모양이 이 비석처럼 생긴 것은 성스러운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여성을 상징하는 모양은 구멍이나 동그라미이고,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을 축약시켜 만든 것이 바로 위패이다.
비의 앞면에는 ‘左中軍同知趙公純之遺墟碑’라 적었고 뒷면에는 그의 행장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후에 충현사(忠賢祠)를 세워 향사(享祀)하였다.
완천당 박선생 유허비(浣川堂 朴先生 遺墟碑)
2011년 8월 19일 촬영
<조순장군비(趙純將軍碑) 찾아 가는 입구 모습>
찾아가는 입구가 정비되지 않아 여기까지 와서도 찾기가 쉽지 않고, 문화재라는 것을 알리는 이정표도 없어 황당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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