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대산면 유등리 김해김씨 저산서원 楮山書院

천부인권 2013. 5. 29. 07:48




경남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유등리 332(大山面 柳等里 332)번지에는 김해김씨 삼현파의 중시조를 모신 1955년(乙未年)에 창건한 저산서원(楮山書院)이 넓은 들판에 세워져 있는데 문정공 정성헌 김관(文貞公 靖醒軒 金菅)을 주향으로 하여, 명회재 김문숙(明晦齋 金文淑), 판관 둔웅 김항(判官 遯翁 金伉) 현감 퇴평 김서(縣監 退平 金湑)를 배향하는 곳으로 향사일(享祀日)은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 : 첫 번째 丁일)이다.

창원시 대산면과 김해시 진영읍을 경계하는 위치인 대산면 유등리(大山面 柳等里)는 옛 유등나루 부근 저소산(猪沼山) 기슭에 위치한다. 창원시 대산면과 밀양시 하남읍을 연결하던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지만 지금은 수산대교의 건설로 나루가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하는 곳이 되었다.



2013.2.25 저산서원 솟을대문


저산서원(楮山書院)은 외삼문·강당·내삼문·사우가 일직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墓)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강당인 홍인당(弘仁堂) 앞마당을 마주하고 있는 동재(東齋)는 소원당(溯源堂)이라하고, 서재(西齋)는 돈서헌(敦敍軒)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홍인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가운데 세 칸은 방이고 양쪽 끝은 마루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이고, 사우(祠宇)인 경덕사(景德祠)는 정면 3칸·측면 2칸이며, 경덕사 마당에 있는 전사청(典祀廳)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중앙의 1칸은 마루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건물 구조와 함께, 주위의 여러 단(壇)과 비(碑)가 갖추어져 있다.[출처 : 디지털창원문화대전]

강당인 홍인당(弘仁堂)에 정면의 현판은 저산서원(楮山書院)이라 쓰여 있고, 건물 대들보에 걸려 있는 현판은 저산재(猪山齋)라 적고 있어 각각의 첫 글자가 楮(닥나무 저)와 猪(돼지 저,암퇘지 차)로 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저산서원 楮山書院 전경




楮山齋記       
楮 金陵小山 介在祖國 洛都之遺墟  墟卽弁韓之甸服 其國俗 尊信桑門 人民克勤王事 鑿沼於此山之下 務蔡倫之業 而常供檀越之幣¹⁾ 因以得名 名亦吉也 吾遠代祖靖醒 明晦 遯翁三先生體魄之藏 在於此 葬靖祖之日 王 遣禮臣李仁復 焙赤土而爲壙 布碧瓦而作板 超加大夫之崇禮 盖見麗朝法制之重也 顧此一點楮山 萬丈恩光 足以輝映於千載之耳目 爰植堂斧 厥像三間 取名楮山 其義允合 視諸安石爭墩之事 相去甚遠 始先生 當麗明夷左腹之際 一心秉直 斥浮屠興儒學 累忤於王旨 退歸田廬 聞忠宣之變 陪王無事而還 未幾 忠惠 又被元流 陪隨岳陽 病橘而殂 先生 服衰痛哭 請身代留 元 感其忠 優禮放還 上襲提學國老舍人父祖之緖業 下貽明晦遯翁退坪子孫之嘉謨 九十六高年 無疾而觀化 其德業之盛 大享乎汾陽之福 仁善之蔭 克昌乎畢萬之後 逮至金尺之朝 百派雲仍 文武幷闡 若將大用 昏朝戊午 蘭臺有事 東市巨禍 洪水橫流 誅戮逐竄門無噍類  先祖血食 顧無可托 繼之北門 重懲熱羹 狼蜂累警 獷燹肆酷 世系文籍 盡入灰燼 祖先墳墓 遺失不傳者 殆三百餘年之久 豈不痛心哉 是以 不肖遠孫 自揣微劣 夙夜恐懼 陪父尋先 許多誠力 竟未免精衛之塡海 以乘牒所載 物色之於楮山 亦積年所 深目其人 尙此未逢 何幸辛酉 三尺誌石 忽露於耕人之犂 仔細詳審 諱爵生卒事蹟 少不相左 廣告湖嶺 與容瀚 錫斗 同均 昌稷 相俊 相洵 諸族彦以行安生之哭 而不日修繕 倣庚桑尸祝之事 而營建小齋 菜豆旣蠲 儀節入縟 竊想先祖在天之靈 必不斁思於僝孫之至誠 洋洋而格 肅肅而臨 將朝暮陟降於斯齋之上矣 願言遠近僉宗 寔顧崇奉之義 將使百世來頭 式遵無忝之責 克守匪懈之訓 同作一家鐵爐之步 是所大望 是爲記
重光大荒落立春節二十一世孫 容植 謹識


저산재기 楮山齋記

저산楮山은 금릉金陵 즉 김해의 작은 산이다. 대개 가락국 도읍이 있었던 곳이며 변한弁韓 영역에 속한 곳이다.²⁾ 그 나라의 풍속이 불교인 상문桑門³⁾믿기를 좋아하고 백성들은 나랏일에 전념을 다하였는데 이 산 아래에 우물을 파고 채윤蔡倫⁴⁾이 처음 만든 종이를 생산하여 나라에 공물로 바쳤다.⁵⁾ 이것으로 인하여 저산楮山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그 이름 또한 길하다. 나의 먼 조상이신 정성헌靖醒軒⁶⁾ 명회明晦 둔옹遯翁 세 선생의 무덤이 바로 이곳에 있다. 정성헌 공의 장례를 치를 때 왕께서 예신禮臣 이인복李仁復을 보내어 황토를 구워서 광壙을 만들고 푸른 기와를 펴서 판을 만들었는데 이는 대부大夫를 숭상하는 예를 넘어서는 것으로 대개 고려왕조의 법제의 엄중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한 점 저산楮山에 베풀어진 만장萬丈같은 임금의 은광恩光을 보면 족히 천년토록 사람들의 이목에 찬란히 비칠 것이다. 이에 집을 짓고 그 규모는 세 칸으로 하고 이름을 저산재楮山齋라고 하니 그 이름과 뜻이 합당하다. 이처럼 조상이 기초돌인 초석을 놓고 후손들이 그를 위하여 터를 닦는 일을 보면 그 거리가 매우 아득하다. 처음 선생께서는 당시 고려가 당한 명이좌복明夷左腹⁷⁾의 어두운 시절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곧게 지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부흥시켜 임금의 뜻에 거슬린 적이 여러 번이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전원으로 돌아와 있을 때 충선왕의 변고를 듣고 왕을 배종하여 무사히 돌아왔다. 얼마있지 않아 충혜왕이 원나라로 유배갈 때 역시 배종하고 따라갔는데 악양岳陽에서 병으로 죽었다. 선생이 상복을 입고 통곡하며 원나라에 자신이 대신 잡혀있고 충혜왕의 시신을 고려에 보내어 줄 것을 간청하니 원이 그 충성에 감동하여 예를 갖추어 방면해 주었다. 위로는 제학提學 국노國老 사인舍人 등의 부조父祖께서 시작하신 사업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명회明晦 둔옹遯翁 퇴평退坪 등의 자손들에게 아름다운 마음을 남겨서 전한다. 구십육九十六세의 고령에 병 없이 선화仙化하셨으니 그 덕업德業의 성대함이 오래도록 천수를 누리는 복을 받게 하였고 그 어질고 선한 음덕은 만대의 후손들을 창성하게 하였다. 금척金尺의 왕조⁸⁾라는 조선에 이르러 그 수많은 파派로 후손들이 번성하고 문관과 무관들이 잇달아 나와 크게 쓸려고 할 때에 무오사화를 당하여 나라에 큰 환란이 닥치고 장안의 동시東市에 큰 화나 닥치고 홍수가 휩쓸고 지나가듯 살육과 유배로 집안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선조의 제사도 기댈 곳이 없게 되었다. 연이어 조정에서 여러 번이나 뜨거운 국을 마신듯 혼이 나고 온 가문이 벌에 쏘인 듯 놀라니 그 끔찍한 환란이 매우 가혹하였다. 그러므로 세계世系를 기록한 문적文籍이 모두 타버렸고 선조의 분묘도 유실되어 전해지지 못한 것이 거의 삼백여년이나 되었으니 어찌 원통한 마음이 없겠는가. 이에 불초 후손이 스스로 미약하고 용렬하지만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아버지를 모시고 선조들의 행적을 찾으며 부단히 정성을 기울였지만 끝내 쌀알로 바다를 채우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승첩乘牒에 실려있는 저산楮山을 물색하여 여러 해를 찾았으나 안목이 깊은 사람도 오히려 만나지 못하였다. 다행히도 신유(辛酉)년에 세 척尺의 지석誌石이 홀연히 밭을 가는 사람의 쟁기 끝에 걸려서 드러났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휘諱나 관작官爵, 생졸生卒연대, 사적事蹟 등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이에 영남과 호남에 크게 알려 용한容瀚 석두錫斗 동균同均 창직昌稷 상준相俊 상순相洵 등 여러 집안의 선비들이 안생安生의 곡을 행하고 몇 일 지나지 않아 수선하였다. 또한 경상자庚桑子 제사를 드리는 시축尸祝의 일을 모방하여 조그마한 재실을 지었다. 제물과 제기를 깨끗이 마련하였고 의례와 범절을 절차에 맞게 다 갖추었다. 생각건대 하늘에 있는 선조先祖의 영령께서 반드시 자손들의 지극한 정성을 좋아하실 것이다. 살아계시는 듯 또렷이 그 모습을 바르게 하시고 엄숙히 임하시어 장차 아침저녁으로 이 재실에 그 영령이 오르내리시게 될 것이다. 원컨대 멀고 가까운 모든 종중의 사람들이여 이처럼 존중하여 받드는 뜻을 생각하여 장차 다가올 먼 후손들이 욕되지 않게 그 책임을 다하고, 조상의 가업을 이어가는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게 하고, 한 집안을 하나의 쇠화로 안에서 만들어낸 물건과 같이 동일하게 하는 일을 하도록 하소서. 이것이 가장 큰 바램입니다. 이로써 기문을 삼는다.
중광대황락(신사辛巳) 입춘절 21세손 용식容植 삼가 지음.


【주석】
常供檀越之幣¹⁾ : 시주施主. 중에게 또는 절에 물건物件을 베풀어주는 사람
변한弁韓 영역에 속한 곳이다.²⁾ : 창원시 대산면 유등포 나루 옆의 산으로 추정된다.
상문桑門³⁾ : 불가를 일컫는 말
채윤蔡倫⁴⁾ : 후한 때 처음 종이를 만든 사람
공물로 바쳤다.⁵⁾ : 시주施主. 중에게 또는 절에 물건(物件)을 베풀어주는 사람
정성헌靖醒軒⁶⁾ : 김해인 자字는 희범希範 호號는 정성헌靖醒軒. 본관은 김해金海이니 고려말高麗末의 문신文臣이다. 초명初名은 관館은 왕의 하사명下賜名이라 한다. 고려高麗의 고종(高宗) 37년(1250년)에  찬지정자參知政事 경손慶孫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號는 정성靖醒, 일찌기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 국자사國子師에 이르렀다. 원종元宗 11년(1270년)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에 안향安珦이 강화江華의 적중敵中에 억류되니 그는 온갖 지혜知慧를 다해 안향安珦을 구출救出하였던 바 왕王이 감동感動하여 그에게 상을 내렸다. 7년뒤 충렬왕忠烈王 3년 (1277년)에 판도좌랑判圖佐郞에 이어 감찰監察어사御史, 국자國子사업司業에 올랐다.
충렬왕忠烈王15년(1289년) 그는 안향安珦과 함께 충선왕忠宣王을 호종扈從하여 원元에 가서 연경燕京에 머무는 동안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이를 안향安珦과 함께 수록手錄하여 왔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주자학朱子學이 들어온 시초始初가 된다. 그는 충렬왕忠烈王 16년(1290년) 밀직시사密直司事가 되고 8년후에는 다시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을 다녀왔다. 충렬왕忠烈王)27년(1301년) 도성都城에 불이 나서 궁전宮殿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을 때 그는 일신의 위험危險을 돌보지 아니하고 화염속에 갇힌 왕王을 구출救出하였다.
충혜왕忠惠王 복위 4년(1343년)원元의 사신使臣이 와서 고려高麗의 충혜왕을 붙잡아가서 계양桂揚(중국어 광동성廣東省)으로 유배流配를 배종하였다.  이듬해 중국의 악양岳陽땅에서 충혜왕이 죽자 그는 원元의 조정朝廷에 나아가 자신自身을 인질人質로 하고 충혜왕의 시신屍身을 고려高麗로 보내어 장사葬事지내게 해 달라고 간청懇請하였다. 원元의 조정朝廷은 이러한 그의 충성忠誠에 감동感動하여 충혜왕의 시신屍身과 함께 그의 환국還國을 허락許諾하였다.
충목왕忠穆王 1년(1345년)그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고 3년뒤 98세의 장수長壽를 누리고 파란의 생애生涯를 마치니 이때가 충목왕忠穆王 4년(1348년) 2월 이였다.  그는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고 창원군(의창구) 대산면大山面 저소산楮沼山에 묻혔으니, 지금 대산면 유등리에 묘墓가 남아 있다.
명이좌복明夷左腹⁷⁾ : 주역의 괘상이다. 명이는 빛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두운 시절이다. 좌복은 임금의 친밀한 신하를 말한다. 좌측 뱃속으로 들어가 임금의 마음을 얻다.
금척金尺의 왕조⁸⁾ :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꿈에 금척金尺을 가진데서 연유됨.





楮山齋重建記
吾金之籍金海者 其麗不億 殆遍滿國中 名卿碩輔 磊落相望 若勝國 版圖判書國子師 文貞公 靖醒軒諱管 卽其一也 公 嘗與晦軒安文成公 友善 以崇正學闢異端 爲己任 迨夫策名立朝 朝著廓淸 綱常是立 社稷賴安 巍功卓節 洋溢中東 累傳而入李氏朝鮮有若節孝 濯纓 三足堂 三先生 道德文章節行 冠冕一時 輝映史乘 且後孫蕃衍 在谷滿谷 在鄕滿鄕 玆豈非文貞公積厚之遺蔭也 歟 舊傳公及以下兩世之墓 在金海(現昌原) 大山面洛東江上野中楮沼山云 而累經兵燹 深目無徵 實爲雲仍之 所共慨恨焉 去辛酉 幸得誌石於溝中 參以譜牒所載 毫無有疑 於是修治塋域 歲薦蘋藻 且構數間屋于柳洞之上 而歲時齊宿之際 頗病湫隘 胄孫璡坤君 創發門議 衆論歸一 乃以戊子之秋 更相地于洞前也 中爽塏處 距墓一弓許 大創工役 而不幸璡坤君 未就而夭 其族人容宇 監董其事 建正堂六楹五架 東西各四架 門樓五架 名其東齋曰 溯源堂 西齋曰 敦叙軒 門名景仰 樓稱望海 額其正堂而聰名之曰 楮山齋 閱八載而告功 宏麗壯雄 制節南州 前臨大野 良田萬頃 錯雜魚麟 橫挹洛江 烟雲蘆萩 帆墻沙鳥 出沒浩蕩 朝暮異狀 擧入於俛仰 眺望之中 凡騷人韻士之行過江之上下者 無不一登遊賞焉 今年春 容宇氏 請余題額 且屬爲之記 誼在同源 寧可用辭 顧今左右交鬨 六洲鼎沸 人獸混淆 而億麗雲仍 能一乃心方 克敦玆役 其追先之誠 牖後之計 可謂兩至無餘矣 寧不偉歟 抑有一言以共之者 凡爲文貞公之苗裔 而登於斯齋者 深念創立之克艱 且念守成之不易 瓦相勉勵 永以勿替 則斯齋將與天壤幷弊矣 余之屬望於諸宗氏者 實無大於此 故書此以先之 嗣當膏車秣馬 與諸宗氏 講信修睦於斯齋之上矣.
歲乙未孟春宗後生金鍾河謹書


저산재중건기 楮山齋重建記
우리 김씨로 김해에 적을 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거의 온 나라에 가득 퍼져 있고 이름난 재상과 벼슬이 높은 사람들도 연이어져 있다. 만약 승국판도판서 국자사 문정공 정성헌 관勝國版圖判書 國子師 文貞公 靖醒軒 管이 그 하나이다.
공은 일찍이 회헌 안문성晦軒 安文成공과 좋은 벗이다.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막는 것을 자신의 임무任務로 삼아 명분을 세우고 조정을 바로잡아 조정의 혼란을 몰아내 기강(紀綱)이 바로서고 사직社稷이 안정되어 우뚝한 공이 탁월하여 온 나라에 가득하였다. 여러 번 전하여 조선왕조에 들어서 절효, 탁영, 삼족당節孝 濯纓 三足堂 세 선생의 도덕道德과 문장文章 절개節槪는 한 시대의 으뜸이며 역사에 길이 빛났다. 또 후손들이 가득 퍼져 골짝기면 골짜기 고을이면 고을에 가득하였다. 이 어찌 문정공의 오랫동안 쌓은 음덕蔭德이 아니겠는가.
구전공舊傳公 이하 양세兩世의 묘는 김해(지금의 창원) 대산면 낙동강 가 들 가운데 저소산猪沼山이 있다고 하나 여러 번 병란을 거치면서 심미안이 있는 사람이 없어 증명할 수 없으니 실로 후손들이 모두 개탄慨歎하고 한스러운 일 아니겠는가. 지난 신유辛酉년에 다행히 도랑에서 묘지석墓誌石을 구하여 족보보첩에 실린 것을 참고하니 추호의 의심이 없었다. 이에 묘역墓域을 손질하여 단장하고 시절 제사祭祀를 드리고 또 유동柳洞 가에 몇 칸의 집을 지었다. 세시歲時 때 재계齋戒하고 잠잘 때에 자못 근심하고 장애가 되었었다. 그 자손인 진곤군璡坤君이 집안의 의론議論을 일으켜 뭇 사람들의 의론을 하나로 모았다. 이에 무자戊子 가을에 마을 앞 들 가운데 확 트인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묘墓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다. 크게 공역을 시작하였으나 불행히도 진곤군은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요절하였고, 그 집 안 사람인 용우容宇가 그 일을 감독하였다. 모두 정당正堂은 6영(楹) 5가架이며, 동서에 각각 4가를 지었고 문루門樓가 5가이다. 동재東齋는 소원당溯源堂이라하고, 서재西齋는 돈서헌敦敍軒이라 하며, 문의 이름은 경앙景仰이라고 하고, 문루의 이름은 망해루望海樓라고 하였고, 그 정당의 총칭은 저산재猪山齋라고 하여 8년이 지나 비로소 마쳤다.
크고 아름답고 웅장雄壯하며 그 규모가 남쪽 지방에서 뛰어났다. 앞으로는 큰 들이 펼쳐져 좋은 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여러 물고기들이 가득한 낙동강이 가로 지르고 있다. 안개와 구름 갈대꽃이 가득하고 돛단배와 모래 위의 새들이 출몰하며 호탕하게 오가는 아침저녁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높고 낮은 곳을 바라보는 중에 눈에 보이니 시인과 묵객墨客들이 이 강가를 오르내리는 경우에 한번 올라 유람遊覽하며 감상하지 않음이 없다. 금년 봄에 용우容宇가 이 액자에 글과 그를 위한 기문을 부탁하였다. 같은 근원根源을 가진 사람으로 무슨 말이 필요하리요.
지금 세상이 좌·우익이 전쟁을 일삼고 온 세상이 들끓고 있으며 인간과 짐승이 뒤섞여 있는 것을 돌아보면 수많은 후손들이 능히 한결같이 마음을 모아 이 일을 돈독敦篤히 실행하니 그 선조先祖를 추모追慕하는 정성과 후손을 인도하는 계획이 모두 지극至極하여 더할 것이 없으니 어찌 위대하다 않겠는가. 다만 한 마디 말로써 그것에 부치자면 대개 문정공의 후예後裔로서 이 재실에 오르는 사람은 처음 세울 때의 지극한 어려움을 깊이 생각해야 하며 또 선조들의 업을 지키고 이루어 감을 바꾸지 말 것을 생각하여 서로 근면勤勉하며 영원히 그침이 없다면 이 재실齋室은 하늘과 땅이 무너진 뒤에야 사라질 것이다. 내가 여러 종중의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이보다 더 큼이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지만 그 먼저 후예들은 마땅히 열심히 자질을 길러 종중宗中의 사람들과 더불어 이 재실에서 믿음을 강학講學하고 화목和睦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을미乙未(1955) 맹춘 종후생 김종하金鍾河 삼가 쓰다.

















原韻(원운)


大江東瀉岳南開(대강동사악남개) 큰강이 동쪽으로 흘러 악산의 남쪽을 열고
畏壘巋然局勢恢(외루귀연국세회) 홀로 우뚝 솟은 보루 모습이 두렵고 형국의 세가 크도다.


十祖濬源通活脉(열조준원통활맥) 열 조부의 뿌리깊은 근원은 생기있는 맥을 통하고
千孫碩果發陽雷(천손석과발양뢰) 천손들의 큰 열매는 양을 발함이 우뢰같네


鴻泥往迹昭詳出(홍니왕적소상출) 큰 선비 옛 자취 소상하게 드러내고
獺本深虔肅儆回(달본심건숙경회) 후손 제사 깊은 정성 엄숙하고 경건하네


將此聿修無忝事(장차율수무첨사) 장차 친히 몸을 닦아 더럽히는 일이 없을지니
屯比吉運付雲來(둔비길운부운래) 둔비의 길운 따라 구름같이 몰려올 터


二十一世孫 容植敬書(이십일세손 용식경서) 21세손 용식이 경근하게 씀.


*屯比 : 주역 屯卦 比卦




謹次楮山齋韻(근차저산재운) 삼가 저산재의 운문을 편찬하다


斧堂肅肅洞天開(부당숙숙동천개) 부당(斧堂)을 엄숙하게 동천에서 열어
實地規模刃到恢(실지규모인도회) 실지의 규모가 넓구나.


克恐邱陵飜歲月(극공구릉번세월) 두려움을 이기고 구릉이 세월을 보내며
不知寰宇盪風雷(부지환우탕풍뢰) 고을 집이 바람과 우레에 씻김을 알지 못했네


先徽晦塞千年久(선휘회색천년구) 선현의 아름다우며 어둡고 막힌 행적이 천년토록 오래고
後社昭明一日回(후사소명일일회) 후손들의 밝은 자취 매일매일 돌아오니


神理洋洋斯陟降(신리양양이척강) 신의 섭리 한없이 넓게 이곳에 오르내리시니
好將俎豆付仍來(호장조두부잉래) 제기를 다스려 부제(조상) 섬김을 좋아하니 이에 자손들이 찾아오네


乙酉九月日(을유구월일)
后孫 煉謹稿(후손 연근고)


*해문-약수(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