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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향교의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

천부인권 2013. 6. 2. 14:44

 

 

 

 


창원향교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향교의 경내(境內)에는 문묘(文廟)에 속하는 대성전(大成殿), 동무(東廡), 서무(西廡)가 있고, 향교의 교육기관에 속하는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서재(西齋)와 풍화루(風化樓)가 있다. 창원향교는 교육 공간이 전면에 제례 공간은 뒤쪽에 배치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취했으며, 외삼문의 역할을 하는 풍화루(風化樓)와 명륜당(明倫堂), 대성전(大成殿)이 일직선상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외삼문인 풍습을 교화한다는 뜻이 있는 풍화루의 오른쪽 문을 들어가면 강학의 공간으로 정면에는 강당(講堂)인 명륜당이 우뚝 솟아 있고, 아래 마당의 우측엔 동재가 좌측엔 서재가 배치되어 있는데 동·서재는 요즘으로 말하면 기숙사이다.

 

 

 

 

 

명륜당은 기단 상면에 자연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그랭이질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와가이다. 좌·우툇칸은 온돌방이고 중앙은 우물마루를 한 대청으로 되어 있으며 천정은 연목이 드러나 있는 트인 공간으로 처리하였으며 추녀에는 활주를 밭쳐 놓았다.
창원향교 명륜당의 중수기들을 살펴보면 김취진(金冣鎭)이 쓴 향교명륜당중수상량문이 있고, 김호원(金鎬源)과 이성응(李星應)이 쓴 명륜당중수기가 있다.

 

세백서 경자(歲白鼠 庚子, 1780) 12월에 성산 이성응(星山 李星應)이 쓴 명륜당중수기(明倫堂重修記)에는 태수(太守) 최병교(崔秉敎)가 성묘(聖廟)에 제례를 왔다가 무너진 처마와 벽을 보고 재력(材礫)을 헤아려 김규혁(金奎爀)에게 일을 맡아보게 하고, 김장(金璋)은 일을 감독케 하여 수리하고 단청까지 마쳤다고 기록하면서 「달구경을 한 해정(海亭 : 고운 최치원 선생이 머무른 곳)을 비롯해 한강 정구선생(寒岡 鄭逑先生)께서 강학한 곳과 성동(城東)에는 정열공 최상국(貞烈公 崔相國)의 여(閭)가 있으니 정(旌), 정(亭)을 갖추었다.」칭송하고 있다.

향교명륜당중수상량문(鄕校明倫堂重修上樑文)은 辛丑年(1841)에 김취진(金冣鎭)이 풍화루서재중수기(風化樓西齋重修記)와 함께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鄕校明倫堂重修上樑文-원문

尊聖衛道之所廟宇儼臨 設敎敦化之方黌堂克壯 三代遺制 千秋盛儀 窈惟夫子之將聖 亦一天道之自然 猶秋冬春夏存神而過化 自南北東西繼往而開來 三綱五常亘古今而以正 萬殊一本探物里而無窮 彼日時此 一時雖或有秦漢焉唐宋焉迭作 由百世等百世孰不 曰天地也 日月也 難名肆爲百王之 所尊 豈特一方之攸敬 所以名敎之地 係是風化之源 天叙昭陳 人文宣朗 內則成均外則州縣祠宇如一潔爾牢醪馨 爾邊豆享祀 以時纓弁爲之藏修 庠序以之紏合 畵欄朱甍屹 然於宮墻之下 明窓翠軒翼如 於殿廡之前 扁堂以明倫顧名而思義 設爲學校 所以明敎 叙以彛倫最關成風 惟司徒契之敬敷 乃紫陽老之華扁 不旦士林之 觀瞻實是造化之根本 豈料四桷之易朽 殊非一木之可支 幾多年邑儒之經營 幸今日府伯之規劃 材木如期 工匠殫力 鳩功效勞亶出衛道之地 輩飛定制 亦由秉彛之天 吾道存焉 斯文備矣 屹厦屋之渠渠 揭華扁之爀爀 呼邪以助 樂爲之辭 抛樑東扶桑瑞旭入簾紅 明明直照吾家路 斯道中 天與不窮 抛樑西月影臺高海色低 舟邑遙通江漢路 年年常貢載南黎 抛樑南 山光海色碧於藍 從來雲霧藏神變日暢造化參 抛樑北 七星如斗列如玉 右文至化占窮宙 絃誦洋洋環海曲 抛樑上九龍山色曉明亮 端笏整衿恭辨香 風傳城角太平響 抛樑下 瓦答農謳遍 四野撲地閭閻成願豊 春臺烟月耀桑柘 伏願上樑之後 賢關常泰 彛敎大行 饕風日息塗有守劒之垊 化日舒長 邑有鳴琴之宰
金冣鎭 記

향교명륜당중수상량문(鄕校明倫堂重修上樑文) - 김취진(金冣鎭) 기(記)

성인을 존중하고 도덕을 호위하는 묘우(廟宇)가 엄연히 섰고, 가르침을 세우고 덕화(德化)를 돈독히 하는 횡당(黌堂)이 지극히 장대하다.
삼대(三代:夏殷周)에 물러진 제도는 천추(千秋)에 그 위의(威儀)가 성대하다. 생각건대 공자가 성인이 되심은 천도(天道)의 자연스러움이 사계절에 신명이 존재하여 계절의 조화가 스쳐감과 같다.
동서남북 사방이 돌면서 가는 것을 이어 좇는 것이 열리는 것과 삼강과 오륜이 고금에 걸쳐 바른 것과 만가지 다른 물상도 한 근본으로 통하니 그러한 물리를 탐구하면 궁하다. 이래도 저래도 한 때인 것처럼 진(秦), 한(漢), 당(唐), 송(宋)이 갈마(羯磨)들어 일어나고 백세를 비롯하던 백세에 대등하던 누가 천지(天地)여 일월(日月)이여 하여도 성인을 이름 하기 어렵다하지 않겠는가. 백왕(百王)이 존숭(尊崇)하던 바가 되니 어찌 비단 한 고을이 공경하는 바로 그치겠는가.
이 향교의 터는 풍화의 근원을 계승하는 곳으로 하늘의 질서가 밝게 펼쳐져 있고, 인간의 문채가 분명히 펼쳐 있도다.
도성(都城) 안으로는 성균관이 있고 밖으로는 주현(主縣)에 사우(祠宇)가 있는 것이 한결 같으니 결뢰료(潔牢醪:재물)과 형변두(馨籩豆:제기)로 지내는 향사(享祀)가 때에 맞다.
선비들은 집에서 수양하고 학교에서 규합한다.
화려한 난간과 붉은 용마루가 학궁(學宮) 담장위로 우뚝하다.
밝은 창과 비취 난간들이 대성전(大聖殿) 앞에 날개를 펼친 듯하다.
당(堂)은 명륜이라 편액하고 사의(思義)로 현판(懸板)하였다. 학교를 짓는 것은 명교(名敎)를 밝히려는 까닭이니 떳떳한 윤리를 펼치는 것은 풍화를 이룸이 관 것이다.
사도계(司徒契)가 공경하고 펼친바가 명륜이요 주자(朱子)가 편액(扁額)한 것이 사의(思義)이다. 이는 비단 선비들의 볼거리만 아니요 실로 조화의 근본이다. 사방 서까래가 쉽게 썩을 것을 어찌 미리 도량하리오. 하나의 나무만으로 지탱함이 아니다.
수 년 동안 고을 선비들이 경영하려 했으나 다행히 금일 부사가 계획하여 도왔다. 재물이 기약한대로 되고 공장(工匠)이 힘을 다하였다.
머리를 모아 공을 다하여 도를 호위할 만한 땅에 명륜당(明倫堂)이 서게 되었다. 날아갈 듯한 이 규모는 천륜(天倫)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의 도가 여기에 존재하고 유교(儒敎)가 갖추어 졌다.
건물은 웅장하여 당당하고 높이 걸린 아름다운 편액은 빛나도다.
신을 불러 도우려 즐거운 시문을 짓노라.
동으로 들보를 올리니 해가 주름에 붉게 비치고, 밝디 밝은 유학의 길을 곧장 비추니 이 도는 하늘과 같아 무궁하리로다.
서로 들보를 올리니 월영대는 높아 바다빛이 어리고 배는 멀리 서울 길로 통하여 해마다 언제나 남려(南黎)에 조공하네.
남으로 들보를 올리니 산 빛, 바다 빛, 쪽보다 푸르고 오가는 구름, 안개 신의 조화 갖추어 비오고 개는 것이 조화에 참여하네.
북으로 들보를 올리니 북두칠성이 구슬같이 벌렸고, 문(文)을 숭상하는 지극한 교화 하늘에 자리 잡아 글 읽는 소리 낭랑히 바닷가에 감도네.
위로 들보를 올리니 구룡산 빛이 아침에 빛나고, 홀기 들고 옷깃 여민 선비들 향을 올려 바람이 전하는 부성(府城)의 오각소리 태평가로다.
아래로 들보를 올리니 농부의 노랫소리 사방에 가득하고 온 고을이 풍년들기 기원하니 봄 누각에 아름다운 달빛 뽕밭에 비치네. 엎드려 바라건대 이 들보 올린 후로 고을이 언제나 태평성대하고 인륜이 크게 행하여지고 전쟁 없이 수자리 갈 사람이 길에 노닐고, 고을 수령이 거문고 타도록 되어라.

 

또한 『향지교 교민위의 고지향학야(鄕之校 敎民爲義 古之鄕學也) 향교는 백성을 교화하여 의롭게 하는 것으로 옛날의 향학이다.』로 시작하는 김호원(金鎬源)이 쓴 명륜당중수기(明倫堂重修記)에는 천재(天災)와 인재(人災)가 번갈아 일어나 교궁(校宮)의 기와가 날아가고 기둥과 서까래가 썩어 중수(重修)를 하려는데 일제가 향교의 맥을 끊기 위해 철도를 부설하니 피하기 어렵다하여 향교를 옮기려 한다면 저들은 없애려 할 것이니 선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의(義)로 항거하여 일제의 방자함을 무시하고 천명(天命)에 따라 황하(黃河)가 맑아지기를 기다려야 한다며, 당시의 절박한 심경을 담았다. 그리고 당시에 수암 권익상(遂菴 權益相)의 주손(冑孫)인 1896년(丙申年) 9월에 부임하여 10월에 부친상으로 교체된 권봉규(權鳳圭) 군수로 육영재(育英齋)를 거접(居接:과거를 보기위해 공부하는 곳)으로 선비들에게 문방사우와 양식을 공급했다고 한다.

 

 

 

 


동재(東齋)는 기단 위에 자연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운 전면 4칸 측면 2칸의 의 맞배지붕으로 전면툇칸과 우측 두 번째 칸은 마루이고 나머지 3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일단 향교의 유생이 되면 양반이나 평민의 구별은 없었으나, 조선 후반으로 갈수록 동재는 양반의 자녀가 기숙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서재(西齋) 역시 기단위에 자연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운 전면 4칸 측면 2칸의 납도리집의 맞배지붕으로 동재와 동일하다. 좌측 퇴칸만 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우물마루를 설치하여 넓은 공간을 확보했다. 상량문에는 ‘孔紀二千五百四十一年庚午十月十五日辰時立柱十八日午時上樑’이라 적혀 있다. 즉 1990년 10월 15일에 상량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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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향교의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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