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민족의 정기를 이어온 통영 삼덕리마을제당

천부인권 2014. 1. 13. 07:00

 

 

<당포성지에서 바라본 장군봉 모습 2014/1/11>

 

통영의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두 개 중 하나는 문화동 122-1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7통영문화동벅수이고, 또 다른 하나는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산128에 있는 삼덕리마을제당(三德里마을祭堂)에 봉안한 장군신도(將軍神圖), 대목마(大木馬)와 삼덕리에서 원항마을로 가는 고개 좌우에 있는 벅수2기가 중요민속자료 제9호이다.

 

 

 

<대각사 전경>

 

경상남도가 2009년에 발행한 문화재도록에 기록된 주소(산양읍 삼덕리 산128)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찾아가면 통영시 산양일주로 1625-116(산양읍 삼덕리 600)’에 위치한 대각사(大覺寺)로 안내를 받게 된다.

만약 대각사로 안내를 받았다면 당황하지 말고 대각사 입구 좌측의 길도 없는 산길을 헤치고 산 위로 40m여를 무작정 오르면 산등성이에 나있는 장군봉으로 가는 오솔길을 만나게 된다.

 

 

 

 

 

산등성이 오솔길에서 우측을 보면 10m 앞에 삼덕리마을제당(三德里마을祭堂)이 있는 장군봉과 돼지바위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보게 된다. 이곳에는 중요민속자료 제9호인 삼덕리마을제당(三德里마을祭堂)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글씨는 사라지고 아무 내용이 없었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통영시의 무관심인지 몰라도 이렇게 관리할 것이라면 철거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장군봉으로 가다보면 부처손이 지천에 있는 큰 암벽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을 오르는 곳엔 밧줄이 나무에 묶여있어 안전하게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삼덕항과 원항마을 풍경>

 

이 암벽을 오르면 확 트인 통영바다를 조망할 수 있고, 원앙마을과 당포라 불리는 삼덕항을 굽어볼 수 있다. 이곳에서 10m 위가 장군봉의 정상이면서 삼덕리마을제당(三德里마을祭堂)있는 곳이다.

 

 

 

 

장군봉 정산에 오르면 먼저 우측의 제단과 좌측의 부셔진 옛 제당을 함께 보게 된다. 그리고 빗돌에 새긴 중요민속자료 제9호라는 표석을 보게 된다.

   

 

 

 

고개를 들면 정면, 측면 1칸인 맞배지붕를 한 건물과 이보다 조금 더 큰 정면, 측면 각각 1칸이지만 앞에 밭침 기둥 2개를 세운 맞배지붕의 건물을 보게 된다. 두 건물의 문은 닫혀있지만 쉽게 열어볼 수 있도록 시근장치는 하지 않고 있다.

 

 

 

<산신각의 모습>

 

무엇이 들어 있을 것인지 궁금해 하면서 첫 번째 건물의 문을 열어 보니 산신도가 정면 벽면에 모셔져 있고 바닥에는 향로와 술잔, 촛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지금의 신당은 1988년에 재건축한 것이며, 신당 옆에는 산신을 모신 당을 새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다음 건물을 열어보니 정면 벽에 새롭게 단장한 장군신도(將軍神圖)가 봉안 되었고, 우측에는 작은 목마와 큰 목마가 나란히 앞을 보고 서있었다. 그리고 좌측에는 예전의 장군신도(將軍神圖)가 많이 훼손된 상태로 뒹굴 듯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훼손된 채 있는 옛 장군신도>

 

 

<사량도의 최영장군신도>

 

장군봉 아래 있는 당포가 이순신장군의 대첩지라 이순신장군과 결부시켜 홍보를 하고 있지만 이 장군신도는 이순신장군 또는 고려장군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지 마을 사람들은 최영장군사당으로 인식하고 있다. 삼덕항에서 사량도를 오가는 배편이 있는데 사량도에 가면 최영장군의 사당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순신장군 보다는 최영장군을 모신 것으로 생각된다. 사량도의 최영장군도와 옛 장군도를 비교해 보면 거친 수염과 말이 함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군봉의 장군은 417일이 생일이며, 이날 당 앞에서 메를 지어 생일을 축하해 준다. 또한 큰 어장이 있는 사람들은 당집 안의 목마에 돈이나 물고기를 걸어 두기도 한다.

 

 

 

<대목마와 소목마>

 

작은 목마는 일제강점기 때 어장을 하던 일본인 다나카가 풍어을 기원하며, 헌납한 것으로 길이 68cm, 높이 65cm로 비교적 정교하게 만든 것으로 말의 귀 하나는 망실 되었고 문화재는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여덟 조각으로 이루어진 대목마(大木馬)는 긴 몸통에 두 귀, 네 다리, 꼬리를 끼워 맞춘 것으로 엉성한 듯 보이는 소박한 모습이 친근감은 준다. 이 엉성한 대목마가 문화재이다.

 

 

 

<벅수 2기>

 

장군봉을 내려와 길이 없는 대각사로 내려 온 후 삼덕리 고갯마루로 가니 길 양쪽에 벅수 2기가 마주보고 있었고 안내표지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산행 길이 시작 된다. 장군봉의 높이는 해발 200m 쯤 되는 마을 뒤 산 수준이라 벅수2기가 있는 원항마을로 가는 고개에서부터 오르는 산행 길을 택해도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덕고개의 벅수 모습>

 

 

장군당 아래 관유마을에서 원항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에 1920년경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남녀 한 쌍의 벅수 2기가 서 있는데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 도로 오른쪽에는 할배벅수가, 왼쪽에는 할매벅수가 있다.

할배벅수는 전체높이 90cm, 앞면 20cm, 옆면 18cm 크기의 화강석으로 깎아 만든 것으로 탕건 모양의 관을 쓴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 길이 90cm 50cm가 머리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가분수 형태로 전체적으로 볼 때 사각형의 각진 모습을 하고 있다. 몸통은 정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형으로 몸통 위쪽은 그 둘레가 좁은 반면 아래쪽으로 갈수록 넓으며, 턱 밑에 직접 몸통이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마모 정도가 매우 심하나 형체를 알아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코, 약간 벌린 듯한 입, 유난히 크게 조각한 귀 등은 얼굴모습을 시원시원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할매벅수는 높이 65cm, 앞면 23cm, 옆면 14cm 크기의 화강석으로 아기자기하게 깎아 만들었는데 얼굴의 형태가 정방형(正方形)으로, 민둥머리를 하고 있다. 전체 크기에 비해 얼굴 부분이 크게 묘사되었지만 몸통 둘레를 크게 해줌으로써 할배벅수보다 비교적 안정감을 준다. 몸통은 둥근 사각기둥 형태로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으며 전체 크기에 있어서도 할배벅수에 비해 아주 작다. 또한 그 마모 정도가 매우 심하여 이목구비가 있으나 선명치 않다. 특히 왼쪽 눈과 입이 마모가 심하여 거의 보이지 않는다. 눈은 약간 튀어나온 듯 하며 코는 삼각형으로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귀는 길고 커서 흡사 부처님 귀와 같고, 이마는 넓어서 기형적으로 보인다.

삼덕고개 석장승은 주 신앙 대상물은 아니나 개인적으로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 많고,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해 부녀자들이 벅수의 코를 많이 갉아 먹었다고 한다. 반대로 유산을 원하는 여자들은 벅수의 눈을 가루 내어 먹었다. 이러한 일은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지인들에 의해서도 빈번히 일어났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할매벅수의 왼쪽 눈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되어 있다. 또한 재혼을 하는 여인네는 마을을 떠날 때 신발을 벅수 앞에 놓고 가는데, 이 때 신발의 방향은 마을을 향하도록 놓는다. 이처럼 신을 놓는 이유는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죽은 신랑의 혼이 따라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이처럼 신 들러간다고 하면 제가를 갔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출처:kocca 문화콘텐츠닷컴-산양면 삼덕리 원항마을 당제]

 

 

 

<당포에서 바라본 장군본 모습>

 

 

이곳 장군봉 안내표지에는 이렇게 적어 두고 있다.

 

송장재에서 바라다보면 산의 지형이 갑옷과 투구를 입은 장군의 모양과 흡사하다하여 "장군봉" 이라 이름 붙였다. 옛날 고관(高官)이 말을 타고 세포곡(細浦谷.산양읍과 미수동 경계)에 이르면 갑자기 말이 주저앉아 버리든가, 아니면 다리가 부러져서 도저히 산양쪽으로 올수가 없었으므로 장군봉에다 목마(木馬)와 동마(銅馬)를 만들어 제사를 올린 뒤부터는 아무사고 없이 말이 통과 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장군봉은 임진란 당시 탁연(卓鍊)장군 형제가 이 산에 와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아우 두분은 전사하고 형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므로 "장군봉" 이라 명명했다는 설도 있다. 정상에 봉수터, 삼덕부락제당, 대각사 등이 있으며, 최근 탁연장군 후손들이 장군봉이 바라다 보이는 남평리 세포마을에 의병 탁연공 충의비(義兵 卓鍊公 忠義碑)”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