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 당포성지>
통영시 산양읍 당포길 12-18(삼덕리 243)에 위치한 경상남도 기념물 제63호는 당포성지(唐浦城址)이다. 이 성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 왜구(倭寇)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최영장군(崔瑩將軍)이 병사와 많은 백성을 이끌고 성을 쌓고 왜구를 물리친 전승지(戰勝地)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이순신장군도 이 성을 이용하여 왜적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이 성은 2중 기단이 된 고려·조선시대의 전형적(典型的)인 석축진성(石築鎭城)이다. 현재 남아있는 석축의 길이는 752m이며, 높이는 2~7m, 너비 4~5m이다.[출처 : 안내표지판]
당포성지(唐浦城址)에서는 삼덕항이 내려다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삼덕리마을제당(三德里마을祭堂)이 있는 장군봉(將軍峰)이 우뚝 솟은 것이 보이는 곳이다. 이 제당의 장군영정을 최영장군으로 보는 것이 바로 이 당포성지를 최초로 건설한 사람이 고려 충신 최영장군이기 때문이다.
이순신(李舜臣)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1592년 5월 7일(양력 6월 16일) 첫 거제 옥포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오후 4시경 웅천 합포를 지나다 5척의 왜선을 만나 남김없이 쳐부수고, 합포구 난포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다음날 5월 8일에 고성 적진포에서 열 세척의 왜선을 무찌른 후 본영으로 돌아간다. 5월 29일 사천선창에 적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 싸운 결과 왜선 13척을 불살라 버리고 왼쪽어깨에 탄환이 관통하는 부상을 입는다. 이 때 처음 거북선이 동원 되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당시에는 미륵도가 고성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6월 2일(양력 7월 10일) 사량도에서 출발한 조선수군이 미륵도 당포선창에 도착하니 적선(賊船) 스무 여 척이 줄지어 머물고 있어 둘러싸고 싸워 당포진(唐浦鎭)을 빼앗았다. 그 날의 기록에는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 밑으로 곧장 충돌하러 들어가면서 미르아가리로 현자 철환을 치 쏘게하고, 또 편전과 대·중·승자총통으로 비 오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떨어진다. 그러자 왜적들은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졸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꺼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 모조리 섬멸하고 한 놈도 남겨두지 않았다. 얼마 뒤에 왜놈의 큰 배 스무 여 척이 부산에서부터 깔려 들어오다가 우리 군을 바라보고서는 개도로 뺑소니치며 들어가 버렸다. 여러 전선이 뒤쫓아 갔으나 이미 날이 어두워 접전할 수 없음으로 진주 땅 창신도(남해 창선도)에 정박하여 밤을 지냈다.”고 한다. 남해 창선도의 왕후박나무가 있는 대벽리에서 지냈다.
<고려시대의 기단부와 조선시대의 성곽 모습이 확실하게 보이는 곳>
6월 4일(양력 7월 12일) “정오에 우수사 이억기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25척의 전선과 함께 하니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했다. 군사를 합치고 약속을 거듭한 뒤 착량포(충무시 당동 착량)에서 밤을 지냈다.”고 난중일기에는 기록하고 있다.
이날 이른 아침에 당포 앞 바다에서 진을 치고 작은 배로 적을 수색하던 차, 10시 쯤 피난 갔던 당포 토병(土兵) 강탁이 조선함대를 보고 달려와 “2일의 당포해전으로 왜적들은 죽은 왜놈의 머리를 많이 벤 후 한곳에 모아 불태우고 그 길로 육로로 갔는데 길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도 죽일 생각도 못하고 통곡하면서 돌아갔으며, 그날 당포 바깥 바다로 쫓겨난 왜적 배는 거제도로 갔습니다.”고 보고한다.
강탁의 정보는 조선함대에 더 없이 중요한 정보로 6월 6일(양력 7월 14일) 벌어지는 당항포 승전의 실마리가 되었다 한다.
<당포성지에서 바라본 중화마을>
<당포성지와 삼덕항 입구 등대와 쑥섬>
<당포성지에서 바라본 산양면 방향>
<당포성지>
<당포성지 정상에서 바라본 삼덕항과 장군봉>
<1872년지방도 당포진도(唐浦鎭圖)>
1872년지방도를 보면 장군봉(將軍峯) 옆에는 필봉(筆峰)이 있는데 필봉은 현재 돼지바위를 지칭하는 것같다. 그리고 산봉우리에 붉은 색이 있는 곳은 봉수대를 의미하고 있다. 배를 수리하는 굴강도 보인다.
<1872년지방도 당포진도(唐浦鎭圖) 확대>
1872년지방도 당포진도(唐浦鎭圖)를 보면 당포진은 지금의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에 있었던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으로 조선시대에는 고성(固城)에 속해 있었다. 동쪽의 삼천진(三千鎭)과 더불어 영남 서부 해안으로 침입하는 적을 차단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鎭에는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시대 1488년(성종 19)에 다시 축성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에게 함락되었다가 이순신 장군에 의해 탈환되었던 성이다. 당시 성의 둘레는 1,455척이었다. 지도는 진기(鎭基)를 중심으로 회화적 기법을 활용하여 산지의 암벽과 수목을 비롯하여 경지의 모습까지도 표현되어 있다. 진성(鎭城) 밖에는 대원군 집권기 국방 강화의 일환으로 설치되는 포수청(砲手廳)과 화포청(火砲廳)이 그려져 있고 선소(船所)에는 환곡고(還穀庫)도 보인다. 통상 성곽의 내부에 있는 객사(客舍)가 여기에서는 선소(船所)가 있는 해안가에 있는 점도 특이하다. 지도의 상단에는 인근 지역과의 도리(道里)와 진(鎭)의 현황을 간단하게 주기해 놓았다.
객사(客舍), 고당포(古唐浦), 곤리도(昆里島), 교청(校廳), 노대도(老大島), 대청봉(待晴峯), 두미도(頭尾島), 둔전(芚田), 만지(挽地), 미륵산(彌勒山), 사량도(蛇梁島), 사령청(使令廳), 사부청(射夫廳), 삼천진(三千鎭), 선소(船所), 소곤리(小昆里), 애도(艾島), 야소동(冶所洞), 연대도(烟臺島), 연화도(蓮花島), 오비도(烏飛島), 욕지도(欲智島), 우도(牛島), 월명도(月明島), 이청(吏廳), 익기서(益己嶼), 장군봉(將軍峯), 저도(楮島), 조도(鳥島), 주봉(胄峯), 중봉(中峰), 착량교(鑿梁橋), 추도(楸島), 포수청(砲手廳), 필봉(筆峰), 한배곶요망(閑背串瞭望), 해도(蟹島), 화약고(火藥庫), 화포청(火砲廳), 환곡고(還穀庫)
통영의 성은 둘레가 1만 1천에 달하는 거성이었고, 본영 수군의 속읍은 거제 외에 10개 군현에 달하고 본영과 속읍 속진의 배가 거의 150척에 달하였다. 충렬사는 서문밖에 있고, 충무공 이순신을 봄가을에 제사지낸다. 충렬사는 1614년(광해군 6)에 세워졌고, 1723년(경종 3)에 사액 되었다. 큰 사각형으로 표시된 세병관은 통영의 객사이다. 통우후유방(統虞候留防)은 1753년(영조 29)부터 바람이 순조로우면 6개월 간 우후가 머물러 지켰던 곳이다. 통영 부근 거제도에도 영등진, 구조라포진, 옥포진, 장목포보 등 진보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거제도의 구조라포에 ‘바람을 기다려 대마도를 왕복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거제도와 대마도 사이에 통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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