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김해읍성 북문 복원이 주목 받는 이유

천부인권 2014. 1. 24. 17:30

 

 

<2014/1/21 김해읍성 북문을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김해읍성 북문인 공진문(拱辰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 읍성철거정책(邑城撤去政策)으로 해체 되면서 고종 32(1895) 이후 도시의 팽창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김해시 동상동 314번지 일원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게 된 것은 현 위치에 성벽과 옹성 일부가 잔존하여 2006년부터 2년간 전면 발굴을 하였다. 북문 복원을 위해 하부구조 및 축성기법을 조사, 분석하고, 김해부내지도(金海府內地圖) 등의 고지도류와 각종 문헌 자료를 참고하였다. 순수 건설비용으로 349천만 원이 들었고, 보상비까지 포함하면 90억 넘게 들여20084월에 북문을 복원하였다.

 

 

 

 

 

김해읍성의 북문 복원이 주목을 받는 것은 가야국 이야기만 전하는 김해에서 조선초기의 성곽복원으로 시대를 이어가는 이야기를 전할 수 있고, 김해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동상재래시장과 연계되어 있어 상인들에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도 있다. 또한 옛 김해의 중심지였던 읍성일대가 김해의 다른 동보다 낙후된 곳으로 변하였던 것을 공진문의 복원을 통하여 중심권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북문인 공진문을 옹성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외부에서 옹성 안으로 들어오는 길 모습>

 

김해읍성은 남해안 일대 특히 김해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노략질에 대비하고자 축성한 성곽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김해읍성은 세종 16(1434)에 축조된 석성으로 문종 원년(1451)에 둘레 4,418, 높이 13, 여장(女墻 : 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 931개소, 적대(敵臺 :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측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곳) 20개소, 옹성(甕城 : 성문보호를 위하여 외부에 설치한 이중 성벽)을 갖춘 문 4개소, 냇물 한곳, 우물 28, 해자(垓字 :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는 둘레 4,683척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옹성 내부의 모습>

 

김해읍지에는 4대문의 명칭을 각각 해동문(海東門), 해서문(海西門), 진남문(鎭南門), 공진문(拱辰門)으로 이번에 새롭게 복원한 북문인 공진문은 현종 7(1666)에 부사 이화악이 중건했다고 기록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