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민초의 땅 통영 미륵산과 봉수대 이야기

천부인권 2014. 1. 17. 11:08

 

 

<2005/12/18 미륵산 정상에서>

 

통영 미륵산(統營 彌肋山; 461m)은 용화사를 품고 있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彌肋佛)의 화신이 통영 앞바다에 떠 있는 미륵도에서 하생할 것이란 민초들의 믿음이 서려있는 곳이다. 미륵불은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에서 머물다가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미래에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이다.

 

통영 8경에 속한다는 미륵산 정상으로 케이블카가 건설되어 지금은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상실했지만 여기에 올린 사진들은 20051218일에 촬영한 것으로 케이블카 공사가 시작되던 때의 모습이다. 당시에는 미륵산 정상표식이 작은 사각돌 이었지만 지금은 커다란 비갈을 세워두고 있다. 미륵산 정산에서는 통영시가지와 통영항과 저 멀리 광도면의 바다가 보인다.

 

 

 

 

산행으로 올라온 미수동 방향의 모습이다. 바다를 항해 이어진 산세와 점점이 떠있는 섬들이 옛 기억을 생각나게 한다. 통영시가지에서 좌측방향의 모습이다.

 

 

 

 

미수동 좌측 산양면 방향의 모습이다. 현금산과 남평리가 발아래 보이고, 저 멀리 대각사가 있는 돼지봉과 삼덕리 장군봉도 보인다.

 

 

 

 

이 사진에는 삼덕리 장군봉은 물론이고 삼덕항과 곤리도, 소장군도 등이 나타나고 수평선이 닺는 지점엔 사량도가 보인다.

15927월 임진년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 당시는 미륵산봉수대가 사용되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하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임진난 당시에는 이곳 미륵도도 고성군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당포성지가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의 주 이동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76(양력 812)<장계에서> 동풍이 세계 불어 향해가 어려웠다. 고성 땅 당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서 나무하고 물 긷고 있을 때, 피란하여 산으로 올랐던 그 섬의 목동 김천손이 우리 함대를 바라보고는 급히 달려 와서 말했다. “적의 대··소선을 합하여 일흔 여 척이 오늘 낮 두시쯤 거제 영등포 앞 바다에서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見乃梁)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다.”고 함으로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했다.] 다음 날 그 유명한 학익진이 펼쳐지는 한산대첩이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날이다.

 

 

 

 

이 사진에는 통영시가지와 거제를 통과하는 견내량(見乃梁)에 설치된 거제대교가 보이고 이순신의 학익진(鶴翼陣)이 펼쳐진 한산도 앞 바다가 보인다. 학익진을 자 타법이라고도 하는데 이 전술의 원리를 왜놈들이 알아 낸 것은 300년 후였다.

 

 

 

 

 

미륵산 정상에서 통영시가를 중심으로 오른쪽을 보면 미륵산 봉수대가 보이고, 한산도를 빠져나가는 외해의 해로가 보인다. 용초도가 끝나는 지점에는 통영의 미인도라 불리는 사이다 선전으로 유명세를 탄 소지도가 수반 위의 섬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다시 오른쪽 사진에는 두미도, 노대도, 욕지도, 연화도 등이 펼쳐져 통영시가 바다의 정원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듯 하다.

 

 

 

 

<미륵산 정상에서 봉수대를 바라보며>

 

통영미륵산봉수대(統營彌肋山熢燧臺)는 통영시 산양읍 세포큰길 125(남평리 산40-1)에 위치한 경상남도 기념물 제210호로 남해안 일대와 대마도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통영성 남쪽 4지점의 미륵도의 미륵산(461m) 정상 부근 제2(450m)에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설치된 봉수대이다. 이 봉수대는 다대포에서 서울에 이르는 제2봉수로에 속하는 곳으로 남쪽으로 거제의 가리산 봉수를 받아 북쪽으로 도산면에 있는 우산 봉수대로 전달하였다. 산봉우리 동남쪽 경사면에 높이 5m정도의 3단으로 된 석축과 북쪽 경사면에 약간의 석축 흔적이 남아 있다. 정상에는 이 석축을 축대로 하여 만든 지름 7.57.8m정도의 반원형 터가 남아 있는데, 바다를 향해 돌출된 형태로 되어 있어 봉수대 또는 망대의 기능을 갖고 있다.

 

봉우리에는 지름 8m쯤 되는 봉수대 터가 남아 있다. 봉수대의 화구부는 길이 1.6m, 0.6m, 깊이 0.6mm가량이고 연소실은 길이 2.2m, 1.8m, 깊이 0.8m가량이다. 앞면 2, 옆면 1칸 정도로 보이는 소형 건물터와 아궁이 시설이 확인되었다.

봉수대 뒤편 약간의 평지에는 간단한 건물터와 함께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조개껍질과 기와 조각, 통일신라시대의 민화무늬 토기조각도 발견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에는 이 지역을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봉수제는 고려 중기에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체계적으로 정비된 것은 왜구의 침입이 심해진 고려 말 이후부터 조선 초기에 이루어 졌다.

평소에는 하나의 연기나 불꽃이 피워지고, 적이 나타나면 둘, 적이 해안에 접근하면 셋, 바다에서 접전이 이루어지면 넷, 적이 육지에 상륙했을 경우에는 다섯의 불이나 연기가 피워졌다.

 

 

 

 

봉수대에서 바라보는 한산도와 고성군의 모습은 미로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케이블카 대신 크래인이 작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