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세상을 꿈꾸는 통영 미륵산 용화사

천부인권 2014. 1. 16. 07:30

 

 

 

<2014/1/11 미륵산 용화사>

 

통영은 많은 부속 섬을 거느린 리아스식 해안의 비경과 바다의 정원을 가진 도시이다. 많은 섬들의 이름을 줄줄 엮어보면 불국정토의 이상세계를 이루려는 민중의 마음이 녹아있다. 섬들의 이름을 불러보면 미륵도, 연화도, 갈도, 욕지도, 연대도, 매물도, 장사도, 국도, 비진도 등 불교와 연관 된 이름들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 중에서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때가 되면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 된 미륵불의 화신이 통영 앞바다에 떠 있는 미륵도에서 하생할 것이란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다. 미륵도(彌勒島)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 세상을 위한 땅이며, 언젠가 민초들의 염원이 이루어질 세상, 바로 용화세상(龍華世上)의 자리이다. 그러니 용화사(龍華寺)는 곧 도솔천(兜率天)에 계시던 미륵불이 하생하여 머물 상주처라고 할 것이다.

 

 

 

 

 

 

용화사 주차장에서 좌측의 가파른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도로명주소가 통영시 봉수로 107-82(봉평동 404)인 용화사(龍華寺)의 입구인 해월루(海月樓)에 도착한다.

 

 

 

 

 

해월루 옆 계단을 오르면 용화사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경내에 들어서면 우측에 세워진 인도 아쇼카 양식의 불사리4사자법륜탑(彿舍利四獅子法輪搭)과 육각형의 사적탑 등을 볼 수 있다.

 

 

 

 

 

용화사는 조선 광해군 8(1616) 성화선사가 세운 절로 광해군 14(1622) 폭풍우로 허물어진 것을 다시 세워 천택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인조 6(1628) 다시 화재로 타버린 것을 행선선사가 자리를 옮겨 짓고 용화사(龍華寺)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화사의 중심 불전인 보광전(普光殿)은 두루 빛을 퍼뜨린다는 뜻으로 무량광(無量光)의 부처님이신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전각이다. 보광전(普光殿)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9호로 등록이 되어 있다.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모신 보광전은 앞면 3·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안쪽은 복잡하고 장식이 많은 천장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공간이 넓게 트여있다.

 

 

 

 

 

<보광전 삼존불>

 

 

 

 

보광전(普光殿) 법당에 걸어 두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통영용화사금고(統營龍華寺金鼓)2001927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63호로 지정이 되었다. 금고란 절에서 사용하는 도구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타악기로 일종의 징이다. 이 용화사금고는 바깥지름 67.7안지름 54.8너비 12.6이다. 표면 둘레 가장자리에는 별다른 문양이 없으며 중심부 역시 문양이 없는 소박한 형태이다. 옆면에는 시주자명과 건륭 49년에 제작되었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어 정조 8(1784)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금고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옆면의 글을 통해 시주자명과 제작연도를 알 수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64호로 지정이 된 통영용화사목조지장시왕상(統營龍華寺木造地藏十王像)은 용화사 명부전에 모셔져 있는 본존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오른쪽에 무독귀왕(無毒鬼王),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冥府十王귀왕·판관·사자상 등 모두 21구의 불상들이다. 이 시왕상 등은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에 소재했던 영은사(靈隱寺)가 폐사되면서 1903년에 용화사로 옮겨져 온 것으로 전해진다.

 

 

 

 

 

 

 

지장보살을 비롯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등은 대체적으로 양호한 상태로 도금 또는 채색되었고, 그 밖의 다른 시왕상 등은 퇴색되었거나 훼손부분을 약간씩 보수한 흔적이 있다. 지장보살의 얼굴은 원만한 편이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 결가부좌의 형태이다. 양손을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으며 왼손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보주(寶珠)도 따로 만든 것이다. 시왕상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의자는 조립식으로 따로 만든 것이며, 시왕상 각각의 지물(持物) 또한 따로 만든 것이다. 귀왕·판관·사자·금강역사상의 대좌와 지물도 따로 만든 것이다. 용화사 사적기(事蹟記) 등으로 미루어 보아 조성연대는 강희 19, 즉 조선 숙종 6(1680)으로 추정된다. 지장삼존상과 시왕상이 상태가 양호하면서 전체적으로 일괄 조성되어 현존하는 드문 형태로 조선시대 불교조각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출처 :문화재청]

 

 

 

 

 

경상남도 문화재 도록에 의하면 용화사(龍華寺)에는 3동의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0호가 198385일자로 등록되어 있다고 적혀 있는데 어떤 건물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용화사에는 목조지장시왕상을 모신 명부전이나 미륵불좌상을 봉안한 용화전, 강당인 탐진당, 선실인 적묵당 등이 있는데 문화재자료로 지정이 된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명부전과 용화전은 포함이 된 듯하다.

 

 

 

 

<뒤에서 바라본 용화전>

 

 

 

<용화전에 봉안한 미륵불좌상>

 

 

 

 

용화사의 현판들 중에는 용화전, 명부전, 종루 등의 글씨는 성파 하동주가 쓴 것이다. 성파는 영남지역을 순방하면서 많은 글씨를 남겼는데 고성 옥천사, 양산 통도사, 부산 범어사, 통영 안정사, 진주 촉석루 등지에서 볼 수 있다.

 

 

 

 

 

 

 

 

절에서 종을 치는 이유는 모든 중생이 종소리를 듣는 순간 번뇌는 사라지고 지혜가 생겨나 욕망에서 벗어나게 하고, 지하세계의 악귀까지 제도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종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져야 하는데 멀리까지 소리가 나도록하기 위해 종두(鐘頭)에 세 번째 용()의 자식인 포뢰(浦牢)를 종두의 고리로 만든다. 포뢰는 고래를 무서워해 고래만 보면 큰 소리로 운다고 한다. 그래서 종채를 고래의 뼈로 만들거나 나무를 고래 모양으로 깎아 사용한다.

 

 

 

 

 

 

명부전과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영각(影閣)의 현판에는 회광 승찬이라 쓰여 있다. 회광 은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효봉(曉峰)을 은사, 탄허(呑虛)을 계사로 모시고 사미계를 받았다.

 

 

 

 

 

영각(影閣)에는 효봉스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스님이 판사직을 그만두고 엿장수로 떠돌던 시절 통영과 처음으로 인연 지은 후 용화사에 오래 주석하면서 미륵산 미래사를 창건 하였다. 이후로 효봉 문중에서는 구산, 법정, 일초(시인 고은)가 배출되었다.

 

 

 

 

 

 

<보광전에서 바라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