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열여섯 허황옥이 첫날밤을 보냈다는 흥국사

천부인권 2014. 1. 23. 09:31

 

금관성파사석탑.hwp

 

<2014/1/21 흥국사 입구>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김해 땅 일원에는 바다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가야국(伽倻國)이 있음을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대략적인 탄생 비사를 엿볼 수 있다. 그 중 특히 가락국(駕洛國) 왕인 김수로와 이팔청춘 허황옥의 하늘이 맺어준 사랑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설처럼 회자된다.

 

 

 

<입구를 오르면 작은 마당에 마주하는 종각의 모습>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이 처음 한반도에 도착하는 내용에 대해 삼국유사 탑상(塔像)편 금관성(金官城) 파사석탑(婆娑石塔)과 기이(紀異)2편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원문과 해석은 이러하다.

 

삼국유사 탑상(塔像)편 금관성(金官城) 파사석탑(婆娑石塔)에는 有緋帆茜旗珠玉之美 今云主浦 初解綾袴於岡上處曰綾峴 茜旗初入海涯曰旗出邊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때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珠玉)을 잔뜩 싣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라 한다. 또 맨 처음에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깃발이 처음으로 해안에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부른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紀異)2편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欲忘子愛下民之惠因號初來下纜 渡頭村 曰 主浦村 解緩袴髙岡曰 綾峴 茜旗行入海涯曰 旗出邊이라 기록하고 있다.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계단을 오르면 마주보게 되는 흥국사 극락전>

 

창원을 출발하여 진해구 용원을 거쳐 김해 땅을 들어서는 순간 부산시 강서구라고 안내를 받게 된다.

~! 이러면 허왕후와 김수로의 사랑 이야기도 부산시와 창원시, 김해시를 오가며 이루어지게 되었다. 금관가야는 해상왕국으로 힘의 원천은 바다에서 나왔는데 이제 김해시는 바다는 하나도 없는 육지속의 섬으로 갇혀버리고 말았구나! 가락국의 역사는 이제 사명이 다해 망했다. 아마 김해김씨와 김해허씨도 이 한반도에서 번창할 힘을 잃었으니 망할 일만 남았다는 생각이 스치는 것은 오로지 나만의 기우일까?

 

 

 

<흥국사 대웅전 모습>

 

부산을 향해 시원하게 뚫려 있는 4차선 도로를 따라가면서 삼국유사에 주포촌(主浦村), 능현(綾峴),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는 지명들이 나오는데 이 지명은 현재 어떤 위치를 말하는지 궁금해 졌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허왕후가 진해 용원동 망산도가 있는 곳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遂命 留天干 押軽舟持駿馬到 望山島 立待申命 神鬼干 就 乗岾 望山島 京南島嶼也 乗岾 輦下國也 忽自海之西南隅掛緋㠶張茜旗而指乎北 留天 等先舉火於島上則競渡下陸爭奔而來 神鬼 望之走入闕奏之上聞欣欣尋遣九干等整蘭橈揚桂楫而迎之旋欲陪入内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 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요, 乘岾은 경기[京畿] 안에 있는 나라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대웅전 내부 정면>

 

위 기록을 보면 기출변은 망산도에서 가주동으로 이어진 수로를 말하고, 주포촌은 보배산(479.5m) 자락의 가주동 인근 바닷가 일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가주동에는 주포2저수지가 현재도 있다. 허왕후가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친 능현(綾峴)은 가주동 뒷산 언덕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늘의 뜻이던 아니던 혼인을 위해 허황옥이 가야 땅에 도착했지만 그 기세는 당당했던 것 같다. 김수로왕이 목메어 기다리고 있는 궁궐로 가지 않고 왕이 나와서 나를 맞이하지 않으니 그냥 따라 갈 수가 없다는 뜻을 전하고, 결국 장막을 치는 임시 궁전을 만들어 그곳에서 초야(初夜)를 치룬다. 임시 궁전이 지어진 곳이 현재의 흥국사가 있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그 내용을 이렇게 적고 있다.

 

王后 乃曰我與等素昩平生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 等返逹 后 之語王然之率有司動蹕從闕下西南六十歩許地山邊設幔殿祗候 王后 於山外 别浦 津頭維舟登陸憇於髙嶠解所著綾袴為贄遺于山霊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대웅전 뒤 삼성각>

 

그리고 긴박했던 하루 일과가 지나고 수로왕과 허왕후(許王后)가 단 둘이 마주한 침실에서 처음으로 통성명을 하고 이곳까지 온 이유를 설명한다. 설명을 들은 수로왕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혼인을 하게 되어 매우 다행한 일이라 고백을 한다.

이 대목에서 살펴보면 김수로왕과 허황옥(許黃玉)은 국제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수로왕이 외국 땅인 가락국에서 왕으로 성공하여 같은 피가 흐르는 씨족의 여성과 결혼을 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후 자식인 거등왕이나 그 손자들이 가락국의 구간들인 원주민과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허왕후을 보필하던 시종들의 자녀와 혼인을 한다는 것은 이런저런 핑계는 있지만 결국 씨족의 피를 계승하려는 본능적 행동이 아니었을까? 삼국유사에서는 초야를 지내는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后 共在御國寢從容語王曰妾是 阿踰陁國 公主也姓許名 黄玉 年二八矣在夲國時今年五月中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爺孃一昨夢中同見皇天上帝謂曰 駕洛國 元君 首露 者天所降而俾御大寳乃神乃聖惟其人乎且以新花家邦未定匹偶卿等湏遣 公主 而配之言訖升天形開之後上帝之言其猶在耳你於此而忽辝親向彼乎徃矣 妾 也浮海遐尋於蒸棗移天夐赴於蟠桃螓首敢叨龍顔是近王荅曰朕生而頗聖先知 公主 自逺而届下臣有納妃之請不敢從焉今也淑質自臻眇躬多幸遂以合歡兩過清宵一經白晝於是遂還來船篙工楫師共十有五人各賜粮粳米十碩布三十疋令歸本國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의 공주인데, ()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흥국사에는 작은 미륵전이 있어 그 내부를 열어 봤다.>

 

흥국사(興國寺)의 안내문에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478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명월산(明月山, 보배산의 능성이 255m)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가야불교의 발원지이다. 1706(숙종 32)년 증원(證元)이 찬한 명월산흥국사사적비문(明月山興國寺史蹟碑文)’에 김수로왕이 48년에 명월산 고교(高橋)밑에서 왕후 허씨를 친히 맞아들여 환궁하였는데 초야를 지낸 이곳에서 허씨의 아름다움을 달에 비유하여 산 이름을 명월산으로 하고, 명월사를 지어 왕조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한편 부인과 세자를 위하여 진국사와 흥국사를 창건하였다.

 

 

 

<미륵전 내부의 모습 진주 명석면의 명석을 생각나게 하는 미륵이다.>

 

 

<흥국사는 사방이 감나무 밭이다.>

 

그 뒤 임진왜란 때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17(광해 9)년 대웅전과 승당, 요사채 등을 중건하였다. 1706년 일원(一元), 일혜(一蕙), 상진(尙眞), 옹준(甕俊) 등이 중수하였는데 그때 담 밑에서 건강원년(健康元年, 144) 3월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서역에서 들어와 불노를 전하니 왕이 중신숭불(重信崇佛)하였다는 명기가 발견 되었다. 그 뒤 한동안 폐사가 되었던 것을 김삼두(金三斗)가 옛 터를 찾아 방치되어 있던 유적을 수습하고, 1942년 우담(雨潭)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풍경>

 

 

<증원(證元)이 찬한 명월산흥국사사적비문(明月山興國寺史蹟碑文)’>

 

 

<사적비와 비석군>

 

 

<종각>

 

 

 

현존하는 담우로는 대웅전과 칠성각, 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부근에서 발굴하였다는 높이 60cm, 너비 80cm정도인 좌불(坐佛)을 양각한 마애불이 극락전에 있다. 마애불 좌우에 코브라 뱀이 불상을 옹호하듯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을 새겨놓았는데 우리나라의 불교 조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인도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증명하는 유물이라고 사찰측에서는 보고 있다. 이 밖에도 사찰 오른쪽에는 가락국태왕영후유허비()와 증원이 세운 사적비가 있으며, 정원 복판에는 1986년에 세운 오층관음보탑과 석동, 사적비 등이 있다. 이 절은 불교의 남방전래설 연구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가락불교의 연구에도 자료가 되는 중요사찰이다.

 

 

금관성파사석탑.hwp
0.0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