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수반 위에 핀 한 송이 연꽃 같은 김해 연화사

천부인권 2014. 1. 25. 20:30

 

 

연화사_사적비.hwp

 

 

 

<2014/1/21 김해 연화사와 김해객사후원지>

 

김해시 동상동 874-10번지에 위치한 연화사(蓮華寺)는 김해동상재래시장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도심 속의 사찰(寺刹)로서 대한불교조계종 범어사 김해 포교당이다. 연화(蓮華)라는 이름처럼 연화사 대웅전은 인공으로 만든 네모반듯한 수반 위에 한 송이 연꽃이 피어 있듯 건설된 독특한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연화사로 들어가기 전 입구 좌우에는 잔디가 식재된 잘 가꾼 정원 같은 공간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에 동상동 873번지 일원인 경상남도 기념물 제267호 김해객사후원지(金海客舍後苑址)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객사(客舍)는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부속 건물로 중앙의 관료가 내려왔을 때 연회를 즐기거나 숙소로 사용하면서 머무르는 곳이다. 안내판이 세워진 이곳이 김해객사후원으로 가락국 후기에는 왕궁 터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해시가 가야왕국을 찾기 위해 이 일대를 발굴해보니 함허정(涵虛亭)의 호안석축으로 추정되는 석렬과 기단석축(基壇石築), 호상집선문 등이 시문된 기와조각, 명문(銘文)을 새긴 기와조각, 15세기~19세기에 해당하는 분청사기 등이 확인되었다. 문화재청에는 호계천(虎溪川)의 물을 끌어들여 인공연못을 만들고 못에 물고기를 넣고 연을 심었으며, 연못의 중앙에 함허정을 지었다. 정자로 가기 위해 사용했을 함허교의 판석으로 추정되는 석판 6, 석불상 2기도 남아있다고 한다.

 

 

 

 

 

 

입구 좌우에 조선시대 성곽처럼 쌓은 담장에 대문을 달아 둔 연화사를 들어서면 좌측에 연화사사적비와 비석들이 세워져 있는데 사적비의 내용을 보면 허왕후(許王后)와 관련 깊은 남방불교와 장유보옥선사의 불교전파 및 가락국 불교 사찰에 관한 것들을 거의 모두 알 수 있다.

 

 

 

 

 

연화사사적비의 내용을 알게 되면 가야의 많은 부분을 알게 될 것으로 생각되어 여기에 전문을 적어 둔다.

 

연화사 사적비(蓮華寺 史蹟碑)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동상동 84번지 연화사 사적

 

1934년전 김수로왕은 구지봉 황금알에서 탄생하셔 지금의 봉황대(鳳凰臺) 동쪽 일대(一帶)에 정궁(正宮)을 세우시고 이곳을 중궁(中宮)터로 도읍(都邑)하셨다. 왕비(王妃) 책봉(冊封)은 멀리 서역국(西域國)에서 도래(到來)하니 맞이하라는 몽지(夢旨)를 받으셨다. 지금의 창원군 용원리 부인당(夫人塘) 앞바다에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실은 한척의 배가 불도를 닦은 스님이 신부(新婦)와 시종(侍從) 수십명을 거느리고 닿았다. 왕은 친히 귀빈일행(貴賓一行)을 영접(迎接)하여 처음으로 성례(成禮)를 올린 곳이 현() 녹산면(菉山面) 지사리(智士里) 명월사지(明月寺地)이며 왕후(王后)를 맞아 합환(合歡)한 곳은 장유면 대청리 불모산 기슭 왕후사지(王后寺地)이다.

 

귀빈은 아유타국(阿踰陀國)(중인도(中印度))의 왕자 보옥(寶玉)(장유(長遊))화상(和尙)과 허황옥(許黃玉) 공주(公主) 이시다. 이는 출가하여 불도(佛道)를 닦아 부왕의 홍법원력(弘法願力)을 실천(實踐)코저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도래(渡來)하사 가락국(駕洛國)에 닿으시니 필경(畢竟) 불법인연(佛法因緣)과 왕()의 숙세인연(宿世因緣)이 있어 왕후로 모신지라 화상(和尙)은 출가(出家)한 몸이시라 궁전(宮殿)에 동거(同居) 못함으로 김해읍 삼방동 신어산에 사찰을 건립하시니 동림사(東林寺)와 서림사(西林寺)(은하사[銀河寺]), 영구암(靈龜庵), 지장암(地藏庵), 청진암(靑眞庵), 영운암(靈雲庵) ()을 창건(創建)하셨다.

 

김수로왕은 화상을 국사로 모시고 정사를 논의하시니 나라는 불국토(佛國土)요 백성(百姓)은 태평무사(太平無事)하였다. 왕은 십왕자(十王子)와 이왕녀(二王女)를 두시어 큰아드님을 거등왕(居登王)으로 책봉(冊封)하시고 차남(次男)과 삼남(參男) 왕자는 왕후(王后)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로 명()하셨다. 나머지 칠왕자(七王子)는 외삼촌(外三寸) 보옥선인(寶玉仙人)을 따라 속세인연(俗世因緣)을 끊고 가야산(伽倻山)으로 입산(入山)하여 삼년간 수도(修道) 하시다가 의령(宜寧)의 수도산(修道山)(자굴산(闍堀山))과 사천(泗川)의 와룡산(臥龍山) 구룡산(九龍山)을 거처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운상원(雲上院)을 세우고 좌선(坐禪)하신지 이년 후에 가락국(駕洛國) 시조(始祖) 육십이년 신라(新羅) 파사왕(婆娑王) 이십사년 음8월 십오일 밤에 오묘(奧妙)한 진여(眞如)를 함께 대오(大悟)하시어 각각 성불(成佛)하셨다. 이로 인()하여 운상원을 칠불선원(七佛禪院) 또는 칠불암(七佛庵)이라 칭()하였다.

 

칠불(七佛)의 명호(名號)1. 김왕광불(金王光佛) 2.김왕당불(金王幢佛) 3.김왕상불(金王相佛) 4.김왕행불(金王行佛) 5.김왕향불(金王香佛) 6.김왕성불(金王性佛) 7.김왕공불(金王空佛) 이시다. 이러한 칠불 탄생지는 천하무비(天下無比)의 성지(聖地) 중 성지(聖地)인지라 과거(過去) 지리산 칠불암에 칠불존영(七佛尊影)을 모셨으나 여수(麗水) 순천(順天) 반란사건(叛亂事件) 때 불타 없어지고 칠불의 탄생지인 연화사(蓮華寺)에 다시 모시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歷史)와 현실(現實)로 당시(當時)의 사찰(寺刹)이나 조각유물(雕刻遺物)들이 가락국 불교를 자랑하고 있다. 김해읍 불암동(선암(仙岩))에는 자연석에 조각된 불상(佛像)과 선유대(仙遊臺)라고 기록된 각자(刻字)가 있었으나 서기 19733월에 남해안 고속도로의 접안(接岸)으로 파괴(破壞)되고 쪼각난 불상(佛像)은 이곳에 존치(存置)되어있다. 또 삼정동(三政洞) 삼구(三區) 초선대(招仙臺)에는 큰암석(岩石)에 자비(慈悲)로운 불상이 조각(彫刻)되어있다 영구암(靈龜菴)에서 국사(國師)가 행차(行次) 하실 때 물고기를 못잡게 방()을 붙인 곳이 오늘의 어방동(漁防洞)이다. 김해읍 구산동(龜山洞) 분산록(盆山麓)에도 무언설법(無言說法)의 거룩한 불상이 계신다. 왕후(王后)께서 이곳 중궁(中宮)에 입궐(入闕)하셔 호계천변(虎溪川邊)에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봉안(奉安)하고 호계사(虎溪寺)를 건립(建立)하여 원당(願堂)으로 모셨다. 오랜 세월(歲月)에 폐사(廢寺)가 되고 탑()은 허태후능전(許太后陵前)에 원형(原形)을 잃은 채 보존(保存)되어 있다. 조상(祖上)을 위()하여 성조암(聖祖庵)을 도해(渡海)한 은덕(恩德)을 빌기 위()해 만장대(萬丈臺) 산정(山頂)에 해은암(海恩庵)을 부왕(父王)의 은공(恩功)을 영원(永遠)히 기리기 위해 밀양(密陽) 삼랑진(三浪津)에 부은암(父恩庵)을 생림면(生林面) 생철리(生鐵里) 무착산(無着山)에 모은암(母恩庵)을 김해읍(金海邑) 봉황산(鳳凰山)(임호산(林虎山))에 도읍지(都邑地)의 융흥(隆興)을 위()해 흥부암(興府庵)을 진영읍(進永邑) 본산리(本山里) 자암산(子庵山)에 태자암(太子庵)을 세웠으나 지금(只今)은 폐허(廢墟)에 옛 일을 고증(考證)하는 불상(佛像)만이 퇴화(退化)된 모습으로 남아있다.

 

수로왕(首露王) 기릉시(起陵時) 무착산정(無着山頂)에 천지(天池)를 결성하고 그 옆에 통천사(通天寺)를 세운 유적(遺蹟)이 있다. 장유면(長有面) 불모산(佛母山)의 장유암(長遊庵)은 장유대화상(長遊大和尙)의 열반지(涅槃地)이므로 불모산(佛母山)이라 칭한다. 빛나고 전통(傳統)있는 우리 가락불교(駕洛佛敎) 역사(歷史)가 중고(中古)에 야평(若平) 미문(未聞)이나 기후(其後) 김해 상동면(上東面) 감로사(甘露寺)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소진(燒盡)되고 남은 영각전(靈覺殿)이 이건(移建)되어 함허정(涵虛亭)으로 되었다가 다시 소실(燒失)된 후 금이백칠십년전(今貳百七拾年前) 가경오년(嘉慶五年)에 군민(郡民)이 양사제(養士齊)로 신건(新建)하였다고 상량문(上樑文)에 의해 밝혀졌으며 약() 60년전 계룡산인(鷄龍山人) 이동은(李東隱) 선사(禪師)께서 김해불교포교당(金海佛敎布敎堂) 연화사(蓮華寺)로 고쳐 법전(法殿)을 봉()하사 중흥(中興)을 이루던 차() 경성(庚成) 십일월 십오일 기화(起火) 소진(燒盡)되니 슬프기 한이 없었다.

 

우리 김해불교신도회에서는 재건(再建)을 위해 고심(苦心)하다가 한일합섬사장(韓一合纖社長) 김한수씨(金瀚壽氏)의 불연(佛緣)으로 그의 상시조(上始祖)이신 태조(太祖) 수로왕(首露王)의 허지(墟地)에 생전(生前) ()하시던 선비주(先妣主) 변무진성(卞無盡性) 보살님의 독실(篤實)한 신심(信心)과 실천과 유훈(遺訓)에 느낀 지효(至孝)한 발심(發心)으로 김한수(金翰壽) 김택수(金澤壽) 두 형제분이 선자모(先慈母) 원당(願堂)으로 생각(生覺)하고 만년대계(萬年大計)의 자재(資材)를 불석(不惜)코 대시주(大施主)가 되시나 임자년(壬子年) 십월 이십일 기공(起工) 을묘년(乙卯年) 사월 일 완공 하였다. 법당 건물 상하 백육평, 요사(寮舍) 이십이평, 일동(壹棟) 원장일체(垣墻一切), 궁허지정리(宮墟地整理), 일주문을 세우고 법당 내부 장식 삼존불상(三尊佛像) 김왕칠불당화(金王七佛幢畵), 장유화상 신중당화(神衆幢畵) 등 총공사비(總工事費) 일금 오천만원을 시주하여 주시고 대중동참(大衆同參)에 대소유연제위(大小有緣諸位)께옵서도 일금삼백여만원을 시주하였다.

 

이러한 인연공덕(因緣功德)으로 위로는 영대(英大)한 불은(佛恩)을 보답(報答)하고 아래로는 무변(無邊)한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여 세세생생(世世生生) 영구보존(永久保存)함으로 제불(諸佛)의 혜명(慧命)을 잇도록 하사이다. 더구나 금년 따라 건국이래(建國以來) 우리 불도들의 숙원(宿願)이던 석존성탄일 국가공휴일 제정이 실현됨은 우리 교당낙성(敎堂落成)으로 더부러 가락불교재흥(駕洛佛敎再興)의 조짐(兆朕)이 나타남이라 믿어 어긋남이 없으리라

 

남무석가모니불

남무가락칠불왕불

남무장유대화상

불기 삼천이년(서기 1975) 을묘 사월 이십일

대한불교 조계종 김해 연화사 주지 이운성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 김해지회 건립

가락유민백의안붕언서어호서지갑천신거(駕洛遺民白衣安朋彦書於湖西之甲川新居)

 

 

 

 

 

비석군 앞에는 고목으로 변한 소사나무 한그루가 심어져 있는데 어떻게 이곳에 이 소사나무가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들이 소사나무를 산에서 만나게 되는 곳은 대부분 산의 7~8부 능선에 올랐을 때이다. 소사나무는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분재로 인기가 놓은데 나무의 수형이 예쁘기도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소사나무를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 소사나무 앞에는 대웅전을 마주보고 7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김해부내지도>

 

연화사의 전신이 김해객사지 중 함허루 자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180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김해부내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고지도를 보면 함허루를 중심으로 보면 우측에 숲속의 초옥인 분성대가 위치하고, 정면에는 연자루(燕子樓)가 위치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또한 호계천(虎溪川)이 수문을 통해 성내부로 흘러 들어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연자루와 함허루 및 가야시대 유물들>

 

 

 

연자루석주(燕子樓石柱)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정사년(1676) 변국한 부사가 중건한 것을 19329월에 철거 되었다. 그후 유일하게 남아있는 연자루 석주1개를 1959년 김해불교신도회 회장 배석현이 자택에 보관하던 것을 주지 강일석이 기증을 받아 연화사에 옮겨 놓았다. 석질은 해석(海石)이며, 높이 122cm, 상단둘레 216cm, 하단둘레 227cm인 팔각기둥이다. 석부의 크기가 옛 연자루의 웅장함을 대변해 준다.

 

 

 

 

연화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함허교와 봉납이라는 석주가 있고, 옛 함허루로 진입하게 했던 석판의 모습이다.

 

 

 

 

연화사가 수반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에 비유가 되는 연화사 대웅전 반영과 유유히 헤엄치며 노니는 비단잉어들도 있다.

 

 

 

호계천은 사라졌지만 해우소 앞에는 샘이 솟아 올라 연화사 연못으로 흘러든다.

 

 

 

 

연화사 뒤편에는 심하게 훼손된 마애불이 대략의 형체만 갖춘 채 방치되듯 봉안되어 있다. 이 마애불은 불암동에 있던 것인데 문화재가 뭔지도 모르는 시절인 남해고속도로 개설공사를 하면서 파손하여 버린 것을 수습하여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역사에 대한 인식과 문화재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이런 처참한 일들은 계속 될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민족과 집안은 필연적으로 망한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훼손된 마애불에서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화강암에 새긴 마애불은 훼손이 심하여 확실치 않지만 두광, 삼도, 긴 귀, 통견의 습의를 두루 갖추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연화사 뒤뜰의 풍경은 한가롭다.

 

 

 

 

그리고 대웅전으로 들어 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다리에는 세심교(洗心橋)라 새겼는데 '마음을 씻는 다리라'는 뜻이라 이 다리를 건너는 순간 인간의 사악한 마음이 씻어 질 것인지 한번 건너 보고 싶었지만 너무나 세속에 물든 인간인지라 서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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