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제주4·3 사건의 현장 ‘큰넓궤’

천부인권 2014. 7. 7. 06:00

 

 

 

 

일반사람들이 제주도 여행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이색적 풍경만 보고 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가 여행을 통해서 얻어가는 것은 껍데기만 보고 느끼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번 지인들과 함께한 제주도 여행에는 우리 근대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제주4·3 사건의 현장을 방문해 보았다. 영화 지슬의 촬영지이기도 한 큰넓궤을 소개해준 조성봉 감독에게 지금에서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우리 근대사의 아픈 역사는 제주4·3 사건을 보는 시각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왜놈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고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던 매국노들이 또 다시 미군의 앞잡이가 되면서 이제까지 자신들의 매국행위를 정당화하는 방법으로 일부의 남로당과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빨갱이라는 이름을 붙여 학살을 한 사건이 제주4·3 사건의 본질이다.

이런 비극의 시작은 독립을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침략으로 일본이 패망하면서 부수적으로 만들어진 독립이다 보니 미군의 침략행위에 동조하는 매국노 무리들이 또 다시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독립투사와 민족의 부흥을 꿈꾸던 사람들은 이런 매국노들이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을 보고 저항 할 수밖에 없었고 저항 세력의 일부는 사회주의를 꿈꾸는 자들도 있었다. 사실 현재 1935년 이전의 사람들 중 교육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이 없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다.

 

 

 

<큰넓궤 입구>

 

 

<큰넓궤 안내도>

 

 

 

 

큰넓궤는 제주4·3 당시 동광리 주민들이 2개월가량 집단적으로 동굴에서 은신 생활을 했던 곳이다. 194811월 중순 미군의 힘을 등에 업은 매국노 집단이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시행하자 주민들은 야산으로 흩어져 숨어 있다가 이 용암동굴로 들어왔다. 당시 버려진 땅인 동광리 산90번지 일대는 험하고 넓어 숨어살기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아이나 노인은 자연 용암동굴인 이 큰넓궤에서 살았고, 청년들은 주변 산이나 근처의 작은 굴에 숨어 토벌대의 갑작스런 습격에 대비하여 망을 보거나 식량이나 물 등을 나르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 굴속에 산지 40여일 후 매국노 집단인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발각되었다. 토벌대가 굴 안으로 들어오자 주민들은 이불솜 등에 불을 붙여 매운 연기가 밖으로 나가도록 열심히 바람을 일으켜 토벌대가 굴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자 굴속으로 총기만 난사하고 철수를 했다. 토벌대가 간 후 주민들은 한라산을 바라보며 무작정 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이들은 한라산 영실 인근 볼레오름 지경에서 토벌대에 총살되거나, 생포된 후 정방폭포나 그 인근에서 집단 학살을 당했다.

큰넓궤 동쪽 50m 지점에 도엣궤가 있는데 이곳에도 항아리 파편 등 당시 생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인근에 제주4·3 당시 없어져 버린 마을 삼밭구석이 있으며, 학살된 후 시신을 찾지 못해 옷가지 등만을 묻은 헛묘도 있다.

 

 

 

 

 

<큰넓궤 입구는 크다란 물고기의 목구멍처럼 좁고 험하다.>

 

당시 이곳에서 동굴 생활을 했던 사람들 중 생존한 동광리 신원숙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밥은 넓은궤에서 하지 않았어요. 근처 작은 굴들이 많은데 주로 거기서 며칠에 한 번씩 해서 밥을 차롱에 담았다 먹었어요. 또 물은 삼밭구석의 소 먹이는 물을 항아리로 길어다 먹었어요. 밖에 다닐 때는 발자국이 나지 않게 돌만 딛고 다니거나, 마른 고사리를 꺾어다가 발 디뎠던 곳에 꽂아 발각되지 않게 했죠. 똥도 밖에 나가 누지 못했어요. 굴 한쪽을 변소로 정해서 거기에다 변을 보도록 했지요. 하동 사람들은 아랫굴에 살았고, 상동 사람들은 주로 윗굴에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상동 사람들은 변소가 있는 굴까지 가기 힘들어 항아리에 쌌다가 한꺼번에 버리곤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