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창원 대암산-끝나지 않은 역사

천부인권 2014. 9. 9. 06:00

 

 

<2014/9/7 대방천>

 

대암산을 오르는 길은 대방그린빌아파트 뒤에서 부터인데 그 옆에 흐르는 급경사의 대방천을 보니 옛 양지마을의 중앙을 흘렀던 하천임을 짐작케 했다. 하천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는 조잡하게 바뀌었지만 물길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산성이의 갈림길에서>

 

창원 대암산을 다녀온 지금에야 창원을 둘러쌓고 있는 둘레 산을 거의 돌아 봤다. 천주산, 태백산, 봉림산, 정병산, 비음산, 대암산, 신정봉, 용제봉, 불모산, 시루봉, 천자봉, 장복산, 반룡산 등은 창원을 요새처럼 둘러쌓고 있는 산들이다. 각 산들의 이름 뒤에는 선조들의 애환과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전설이 되기도 하고, 축제로 승화(昇華)되기도 한다.

 

 

 

<핼기장에서 바라본 대암산>

 

대암산 정상은 해발 669m로 표지석을 세운 곳은 동그랗게 견치돌을 2m정도의 높이로 쌓고 돌계단을 만들어 오르게 되어 있어 제단처럼 보인다. 이 시설물은 슬픈 역사 이지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잊어서는 안 되는 큰 교훈을 가진 것이다.

 

 

 

<성을 쌓았던 흔적>

 

대암산 정상이 움파인 웅덩이 같이 생겼다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피눈물 나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 같지만 알고 보면 70년 밖에 되지 않는 이 땅의 역사이다.

 

 

 

<진해만이 훤히 바라보인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을 말살하고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이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왜놈들의 치다꺼리나 처리하는 노예 같은 수모를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40여 년 간 고난의 역사는 끝없이 이어져 왔다. 일제는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진해만을 중시 했는데 진해(鎭海)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진압할 진), (바다 해) 즉 바다를 진압한다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 수군을 괴멸시킨 곳이고, 러일전쟁 때에는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러시아의 발틱함대 주력 전함을 깨끗하게 잠재운 곳이다.

 

 

 

 

창원의 둘레 산을 돌아보면 이런 흔적 들이 곳곳에 보이기도 하지만 바다와 한참 떨어진 대암산에 이런 시설을 왜 했는지 정상에 올라 보면 알게 된다. 대암산 정상의 시설물 흔적은 140m 정도에 걸쳐 만들어 졌는데 표지석이 있는 곳은 단을 쌓아 포를 배치한 듯하고, 정상의 흙을 파내고, 요새를 만든 듯 보이는 곳은 숙소와 창고로 쓰인 듯 보인다. 숙소와 창고는 지하로 다니게 되어 있다. 동그랗게 지하 방카를 만든 창고는 밖에 돌로 성을 쌓았던 흔적이 지금도 일부가 남아있다.

 

 

 

 

 

일제는 이런 시설물을 만들 때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부역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노역을 시켰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외할아버지도 이 시설물을 만들고 시설에 필요한 물건을 나르는 노역을 했다고 한다. 669m를 오르는 길은 만만한 것은 아니다. 맨 몸으로 오르는 것도 힘든 곳인데 지게에 물건을 지고 아무른 이득도 없이 이를 악물고 올라가는 이 산길은 극한의 고통이고, 나라 잃은 서러움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 선조들의 고통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2차 세계대전에 패한 일제는 무기와 의복만 가지고 철수를 하여 이곳에 남아있던 식량과 기타 물품들은 치안이 불안했던 때라 인근의 장정들이 밤에 몰래 올라와 가져갔다고 한다.

 

 

 

 

아픈 역사도 기억해야 할 우리들의 역사이고 흔적인 만큼 이런 역사적 시설에 팻말하나 붙이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후대의 도리가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못하면 역사는 또 다시 반복을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창원시는 대암산을 찾는 시민들에게 역사를 알려 이 땅이 다시는 외세의 침략에 무너지지 않도록 상기시켜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