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보호수와 노거수

성산구 목동 보호수-느티나무 2그루

천부인권 2014. 11. 20. 06:00

 

 

 

<2014/11/18 LG창원2공장 내-느티나무>

 

창원시에는 53개소 87본의 보호수가 있는데 성산구에는 7개소 8본의 보호수가 있다. 수종으로는 서나무 2, 푸조나무 2, 느티나무 2, 왕버들과 팽나무가 1본씩 있다. 그 중 성산구 성산동 76번지에 위치한 느티나무 2그루는 LG창원2공장 내에 있어 공장정문에서 신청을 하고 직원 1분과 동행을 하여야 보호수가 있는 곳까지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번거로우면 공단로 상복사거리를 찾아가 담장 밖에서 촬영도 가능하다.

 

 

 

 

 

<2014/11/18 옛 목리 당산나무-느티나무>

 

이 느티나무 2그루는 2013614일에 2013-12-2호로 창원시의 보호수 지정번호를 받았으며, 큰 나무의 수령은 300, 나무 높이는 23m, 가슴높이 둘레는 410cm나 된다고 창원시는 기록하고 있지만 실재로 재어보니 가슴높이 둘레가 460cm이고, 작은 나무의 가슴높이 둘레는 330cm였다. 그리고 한그루는 죽은 흔적이 있어 처음에는 3그루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느티나무는 옛 목리(木里)마을의 당산목으로 예부터 주민들이 매년 음력 정초(正初)에 당산제(堂山祭)를 지내어 오다가 1974년 산업기지개발로 인해 마을 전체가 봉림동으로 이주(移住)하게 된 후 한 동안 당산제를 지내지 못했지만 현재에는 다시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본래 이 자리에는 큰 회화(槐軒)나무가 있어 화목리(花木里)라 불렀지만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리(井里) 일부를 병합하여 창원군 웅남면(熊南面) 목리(木里)가 되었다. 창원산업기지개발로 1987년 금성사 창원2공장으로 준공했으나 지금은 LG창원2공장이 되었다.

 

 

 

 

 

이 느티나무 아래에는 2기의 비석이 있는데 1기는 마을에 기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고, 다른 비석은 전면에 목동유적지영세불망비(木洞遺跡地永世不忘碑)”라 새기고 마을 내력을 적었는데 분성 배씨와 밀양 박씨 등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적었으며, 글쓴이는 분성인 배익구(盆城人 裵益九)이다.

 

 

목동유적지영세불망비 ( 木洞遺跡地永世不忘碑)

 

목리유적지영세불망비(木洞遺跡地永世不忘碑)
우리 고장 목동은 이 지대를 교남의 승지(勝地)라고 한다. 북으로 천주산(天柱山)이 동남으로 뻗으면서 정병산(精兵山) 정기를 이어받아 불모산 영봉이 솟아있고 장복산(長福山) 장엄(莊嚴)한 위용(威容)은 룡이 하늘을 오르는 듯 다시 천주산을 향하여 높은 산, 낮은 봉우리들이 병풍(屛風)처럼 둘러쳐져 있다. 성주계곡은 수석이 명미(明媚)한 곳으로 그 흐르는 물 백천(百川)이 합류하여 남천(南川)이 되어 남면(南面) 들판을 굽이쳐 흐르면서 서편(西便) 한 모퉁이를 뚫고 바다와 연결된다. 이 고장은 기후풍토(氣候風土)가 좋아 살기 좋은 낙원지(樂園地)이다. 유구한 역사에서 이곳 유래가 전해온 것은 400여 년이다. 임진왜란 때 초토(焦土)가 된 땅에 분성배씨(盆城裵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다시 터전을 마련하고 그 후에 초계 변씨, 김해 김씨, 연안 김씨, 연안 명씨, 동래정씨, 밀양손씨, 의성김씨, 경산 김씨, 달성 서씨, 상산 김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서 산 곳이다. 목동향양제는 오랜 전통의 한문서당이며 덕천계곡은 풍치좋은 곳이오. 이천년 전 창건된 성주사는 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같이한 유서깊은 사찰이다. 조국 근대화시책에 따라 산업기지개발로 지정된 지역에 산을 파고 내를 막아 공장이 들어서고 배후도시 건설되니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변한 형국(形局) 옛자취 볼 수 없네. 목동유적지로 보존케된 이 당산림(堂山林)은 우리조상들의 얼이 심어져 있는 곳이며 장복산신(長福山神)을 모신 제단으로서 매년 음력 정초에 동민들이 산신제를 봉행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자손만대(子孫萬代)의 번영을 염원하던 곳이다.이 당산림이 훼철(毁撤)될 위기(危機) 직전에 놓였다가 잔존(殘存)케 된 것은 동유지(洞有志)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조국의 엄숙한 명에 따라 우리 동민들은 온갖 비통을 안고 지남지북(之南之北)으로 떠나가는 이산민(離散民)이 되었다. 조상 대대로 면면히 계승해 오던 고토(故土))가 형적(形跡)도 찾아볼 수 없으니 이 엄연한 현실 앞에 실의(失意)와 감회를 감출 길 없어 이 비를 세우고 망향(望鄕)의 그리움을 달래면서 매년 이 날에 모여서 기념코져 한다. 동민들의 간곡(懇曲)한 청을 사양하다 못해 삼가이 글을 쓰다.
목동의 연혁 : 동초창기(洞初創期)는 목리, 정리, 상리지구가 합동이고, 연대 삼백팔십 여 년전 서기 1800년 경 창원부남면진목정(昌原府南面眞木亭)의 표기 있음. 서기 1910년경 창원군 웅남면(熊南面) 목리(木里)로 개편 됨. 서기 1973년 7월 1일 마산시에 편입되었다가 서기 1980년 4월 1일 창원시로 승격함.
서기 1980년 4월 일
분성인 배익구(裵益九) 삼가 짓고
동민일동 지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