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8 LG창원2공장 내-느티나무>
창원시에는 53개소 87본의 보호수가 있는데 성산구에는 7개소 8본의 보호수가 있다. 수종으로는 서나무 2본, 푸조나무 2본, 느티나무 2본, 왕버들과 팽나무가 1본씩 있다. 그 중 성산구 성산동 76번지에 위치한 느티나무 2그루는 LG창원2공장 내에 있어 공장정문에서 신청을 하고 직원 1분과 동행을 하여야 보호수가 있는 곳까지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번거로우면 공단로 상복사거리를 찾아가 담장 밖에서 촬영도 가능하다.
<2014/11/18 옛 목리 당산나무-느티나무>
이 느티나무 2그루는 2013년 6월 14일에 2013-12-2호로 창원시의 보호수 지정번호를 받았으며, 큰 나무의 수령은 300년, 나무 높이는 23m, 가슴높이 둘레는 410cm나 된다고 창원시는 기록하고 있지만 실재로 재어보니 가슴높이 둘레가 460cm이고, 작은 나무의 가슴높이 둘레는 330cm였다. 그리고 한그루는 죽은 흔적이 있어 처음에는 3그루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느티나무는 옛 목리(木里)마을의 당산목으로 예부터 주민들이 매년 음력 정초(正初)에 당산제(堂山祭)를 지내어 오다가 1974년 산업기지개발로 인해 마을 전체가 봉림동으로 이주(移住)하게 된 후 한 동안 당산제를 지내지 못했지만 현재에는 다시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본래 이 자리에는 큰 회화(槐軒)나무가 있어 화목리(花木里)라 불렀지만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리(井里) 일부를 병합하여 창원군 웅남면(熊南面) 목리(木里)가 되었다. 창원산업기지개발로 1987년 금성사 창원2공장으로 준공했으나 지금은 LG창원2공장이 되었다.
이 느티나무 아래에는 2기의 비석이 있는데 1기는 마을에 기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고, 다른 비석은 전면에 “목동유적지영세불망비(木洞遺跡地永世不忘碑)”라 새기고 마을 내력을 적었는데 분성 배씨와 밀양 박씨 등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적었으며, 글쓴이는 분성인 배익구(盆城人 裵益九)이다.
목리유적지영세불망비(木洞遺跡地永世不忘碑)
우리 고장 목동은 이 지대를 교남의 승지(勝地)라고 한다. 북으로 천주산(天柱山)이 동남으로 뻗으면서 정병산(精兵山) 정기를 이어받아 불모산 영봉이 솟아있고 장복산(長福山) 장엄(莊嚴)한 위용(威容)은 룡이 하늘을 오르는 듯 다시 천주산을 향하여 높은 산, 낮은 봉우리들이 병풍(屛風)처럼 둘러쳐져 있다. 성주계곡은 수석이 명미(明媚)한 곳으로 그 흐르는 물 백천(百川)이 합류하여 남천(南川)이 되어 남면(南面) 들판을 굽이쳐 흐르면서 서편(西便) 한 모퉁이를 뚫고 바다와 연결된다. 이 고장은 기후풍토(氣候風土)가 좋아 살기 좋은 낙원지(樂園地)이다. 유구한 역사에서 이곳 유래가 전해온 것은 400여 년이다. 임진왜란 때 초토(焦土)가 된 땅에 분성배씨(盆城裵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다시 터전을 마련하고 그 후에 초계 변씨, 김해 김씨, 연안 김씨, 연안 명씨, 동래정씨, 밀양손씨, 의성김씨, 경산 김씨, 달성 서씨, 상산 김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서 산 곳이다. 목동향양제는 오랜 전통의 한문서당이며 덕천계곡은 풍치좋은 곳이오. 이천년 전 창건된 성주사는 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같이한 유서깊은 사찰이다. 조국 근대화시책에 따라 산업기지개발로 지정된 지역에 산을 파고 내를 막아 공장이 들어서고 배후도시 건설되니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변한 형국(形局) 옛자취 볼 수 없네. 목동유적지로 보존케된 이 당산림(堂山林)은 우리조상들의 얼이 심어져 있는 곳이며 장복산신(長福山神)을 모신 제단으로서 매년 음력 정초에 동민들이 산신제를 봉행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자손만대(子孫萬代)의 번영을 염원하던 곳이다.이 당산림이 훼철(毁撤)될 위기(危機) 직전에 놓였다가 잔존(殘存)케 된 것은 동유지(洞有志)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조국의 엄숙한 명에 따라 우리 동민들은 온갖 비통을 안고 지남지북(之南之北)으로 떠나가는 이산민(離散民)이 되었다. 조상 대대로 면면히 계승해 오던 고토(故土))가 형적(形跡)도 찾아볼 수 없으니 이 엄연한 현실 앞에 실의(失意)와 감회를 감출 길 없어 이 비를 세우고 망향(望鄕)의 그리움을 달래면서 매년 이 날에 모여서 기념코져 한다. 동민들의 간곡(懇曲)한 청을 사양하다 못해 삼가이 글을 쓰다.
목동의 연혁 : 동초창기(洞初創期)는 목리, 정리, 상리지구가 합동이고, 연대 삼백팔십 여 년전 서기 1800년 경 창원부남면진목정(昌原府南面眞木亭)의 표기 있음. 서기 1910년경 창원군 웅남면(熊南面) 목리(木里)로 개편 됨. 서기 1973년 7월 1일 마산시에 편입되었다가 서기 1980년 4월 1일 창원시로 승격함.
서기 1980년 4월 일
분성인 배익구(裵益九) 삼가 짓고
동민일동 지를 세움
'식물 > 보호수와 노거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모산동 기축골 보호수-팽나무 (0) | 2014.11.22 |
---|---|
창원 대방 음지 보호수-서어나무 (0) | 2014.11.21 |
동정동 보호수-은행나무(암) (0) | 2014.11.19 |
강민첨이 심었다는 두양리 은행나무 (0) | 2014.11.17 |
사림동 보호수-회화나무 (0) | 2014.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