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절 속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 표충사

천부인권 2015. 1. 25. 14:34

 

 

 

<2015/1/15 해남 두륜산 대흥사 표충사>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 모든 국가의 모습이 바뀌게 되는데 특히 불교계에도 그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절속에 세워진 사당(祠堂)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의(忠義)를 내세워 조선을 구한 서산대사와 그 제자들을 기리기 위해 국왕이 편액을 내린 사당이 절속에 세워진다.

그 첫 번째가 1743(조선 영조 19)에 편액이 하사된 밀양(密陽) 재악산(載嶽山) 표충사(表忠祠)로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당(四溟堂), 기허당(騎虛堂, 靈圭, ~1592) 3대사(三大師)를 춘추(春秋)로 향사(享祀)하게 되었다.

두 번째가 1787(정조 11) 전라남도 해남의 두륜산 대흥사에 서산대사와 사명당, 뇌묵당 처영(雷默堂 處英)을 제향 하는 표충사(表忠祠)가 건립되었다.

그리고 1794년 평안도관찰사 이병모(李秉模)의 요청에 따라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묘향산 보현사의 수충사(酬忠祠)’에 편액이 하사되어 절과 사당이 공존하는 시대를 열게 되었다.

 

 

 

 

 

<대흥사 표충사 앞 장군샘>

 

이 곳 샘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맑고 상쾌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마다 한번씩 호수의 흐름을 보였는데 절의 중이 자정 무렵, 물이 소용돌이치며 지붕추녀 끝까지 솟구쳐 오를 때 이물을 마시고 모든 질병을 고쳤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부터 약을 달이고 차를 끓이는데 있어 이물을 최고로 여겼고, 장군샘의 이름은 윤선도가 이곳 승려들의 지혜와 기력을 보고 능히 장군을 낳을 샘이라하여, 하루도 그러지 않고 길어다 먹은 데서 유래되어진 것이다.

<호국문>

 

표충사에 들어가는 첫 번째의 문으로 가운데 문을 좌우의 문보다 한 단 높게 세운 솟을삼문으로 지어졌다. 정문은 혼령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제사 지낼 때만 열어두고 사람들은 양쪽 협문으로 다녀야 한다. 서산대사의 호국의식을 기리기 위해 호국문(護國門)이라 하였다.

 

護國門처럼 사당(祀堂)의 입구에 세워진 솟을삼문을 통행하는 방법은 우측문으로 들어 갔다가 우측문으로 나오면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측통행을 말한다. 중앙의 문은 신도(神道)라 하여 누구도 통행하지 않는 곳이다. 향교나 궁궐, 사당 등 제사를 지내는 공간은 모두 동일하다. 심지어는 무덤을 방문할 때에도 같은 우측통행을 하는 것이다.

 

 

 

 

 

 

<대흥사 표충사구역>

 

표충사(表忠祠)는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1520~1604)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祠堂)으로서 조선시대 대흥사의 위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고 그 법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선()과 교()의 종원(宗院)으로 자부하였다. 이에 1788년에 사액사우(賜額祠宇)의 건립을 추진하여 표충사(表忠祠)로 지정되었고 정조대왕이 직접 쓴 表忠祠편액이 내려졌다. 호국문과 예제문을 지나면 표충사의 표충비각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1836년에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가 1860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은 것이다.

 

 

 

 

 

<의중당>

 

호국문을 지나 맨 먼저 마주치는 건물로 정면 5,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의중당은 서산대사의 위국충정(衛國忠情)을 기리기 위해 인근 6개 군의 수령들이 봄·가을로 표충사에서 제향을 지낼 때 가지고 온 재물을 차리던 곳이다.

 

 

 

<보련각>

 

초의선사가 1852(조선 철종 3)에 역대조사들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이곳에 처음 건립하였다. 1920년 이후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태능(逍遙太能;1562~1649)스님과 편양언기(鞭羊彦機;1581~1644)스님의 법손들이 두 문파의 선사 22위의 진영을 보련각에 공동으로 모시고 제사 지냈다. 그 후 건물이 퇴락하여 1944년에 중수하였다. 본래는 대광명전 뒤에 위치하였던 건물인데 2009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예제문>

 

표충사에 들어가는 두 번째 문으로 호국문과 마찬가지로 솟을삼문으로 지어졌다. 예제(禮齊)라는 말은 논어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무치.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 덕으로서 인도하고 예로서 다스리면 부끄러움을 알고 바르게 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이문을 드나들 때에는 예를 갖추라는 의미에서 예제문이라 했다.

 

 

 

 

 

 

<대흥사 표충사>

 

표충사는 1788년에 건립되어 정조대왕이 직접 쓴 表忠祠편액이 하사 되었다. ‘어서각(御書閣)’이라는 편액은 임금의 글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곳의 편액이 정조대왕의 글씨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1520~1604)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1836년에 다른 곳으로 이건 되었다가 1860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고, 상량문은 초의선사가 썼다.

 

 

 

 

<대흥사 표충사>

 

서산대사가 임진왜란 때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중앙에 서산대사의 진영이 있고 양쪽으로 서산대사의 제자로 전란에서 공적을 세운 사명당 송운 유정(四溟堂 松雲 樵政;1544~1610)스님과 뇌묵당 처영(雷默堂 處英)스님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대흥사 표충비각>

 

표충비각에는 서유린(徐有隣; 1738~1802)1791(조선 정조 15)에 지은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명(西山大師表忠祠記蹟碑銘)”과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스님이 1792(조선 정조 16)에 지은 건사사적비명(建祠事跡碑銘)”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60년에 표충사를 이건할 때 지은 것이다.

 

 

 

 

 

<조사전>

 

표충사의 좌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3단 기단 위에 세워진 전각이다. 한글로 된 조사전 편액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514년에 대흥사를 중건한 아도조사를 비롯하여 대흥사의 역대조사 16명을 그린 3(61, 52)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