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두륜산 대흥사 천불전과 용화당

천부인권 2015. 1. 23. 07:54

 

 

 

대흥사 가람배치를 남원구역과 북원구역으로 나누어 설명을 하는데 천불전과 용화당 등은 남원구역에 배치가 되어 있다. 해탈문의 정면에 전각들이 모여 있는 곳이 금당천의 남쪽에 해당하는 남원구역이다. 남원에는 중심법당인 천불전이 있고 용화당과 적묵당 등이 돌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천불전(千佛殿)은 과거, 현재, 미래 언제 어느 곳이나 항상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미에서 천불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매우 경쾌하여 정면 3칸의 분합문 전체가 아름다운 꽃창살로 꾸며져 있다. 이 건물은 순조 11(1811)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31년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이며, 다포계의 팔작지붕으로서 전형적인 조선 후기 건물이다. 편액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1705~1777)가 썼다. 법당 중앙에는 목조 석가모니부처님과 문수,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고, 그 주위에 전남유형문화재 제52천불상(千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 법당에 모셔진 천불상 조성과 관련하여 전남 화순 쌍봉사의 화원승(畵員僧)인 풍계현정(楓溪賢正)스님이 해남 대둔사[현 대흥사] 완호 윤우(翫虎 倫佑)의 요청으로 경주 불석산(佛石山)에서 옥돌로 천불을 조성하게 되었다. 천불이 완성 되자 232위는 작은 배에 싣고, 768위는 큰 배에 실어 1817년 운반 도중 부산 앞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작은 배는 무사히 해남에 도착했으나 큰 배는 일본 큐슈(九州)로 표류해 갔다가 7개월이 지난 다음 해인 1818년에야 대흥사로 돌아와 봉안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정을 비롯한 27명이 일본에서 겪었던 일과 일본의 풍습 등을 기록한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천불 가운데에는 어깨에 자가 적힌 불상이 있다. 4년에 한 번씩 천불의 가사를 바꾸어 드리는 불사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수하셨던 가사를 개인이 소장하게 되면 마음속의 소원이 이루어 진다하여 많은 분들의 동참이 이어지고 있다.

 

 

 

 

천불전 주련

世尊坐道場(세존좌도장) 세존이 앉으신 이 도량에

淸淨大光明(청정대광명) 청정한 대광명 빛나니

比如千日出(비여천일출) 마치 천개의 해가 떠서

照曜大千界(조요대천계)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이듯 하네

 

 

 

 

천불전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으로는 아름다운 꽃창살도 있지만 천불전을 밭치고 있는 기둥이다. 대흥사뿐만 아니라 기둥의 굵기가 어느 전각에도 없을 정도로 굵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A자형으로 이루어진 기둥의 모양은 안전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곳 안내판에는 용화당(龍華堂)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인 용화당은 중들이 거처하는 요사체로 지형을 그대로 유지 하면서 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건축한 자연 친화적인 건물이다. 건물의 남쪽 부분은 자로 꺾어 돌출시킨 부분이 있어 맞배지붕을 얹어 연결시켰고, 다른 쪽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이 건물은 순조 11(1811)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의 스승인 완호대사(翫虎大師1758~1826)가 중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 겸 선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813년에 중건한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구한말 서예가로 유명한 성당 김돈희(金敦熙:1871~1936)가 썼다.

 

 

 

 

 

 

 

천불당을 나와 표충사로 향하는 곳에는관음33응신정(觀音三三應身殿)이 있어 보니 중앙에 천수관음이 모셔져 있다. 중국의 농아인이 펼치는 천수관음무를 보면서 느꼈던 그 환상적인 느낌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 같은 환상을 느끼며 절속의 사당(祠堂)이 이채로운 표충사로 향한다.

 

 

 

 

<천수관음>

 

 

 

어느 절이나 할 것 없이 절 근처의 큰 바위에는 마애비가 있는데 대흥사 경내에 있는 큰 바위에도 4개의 공적비를 나란히 새긴 마애비가 있어 보니 대흥사에 공적이 있었던 군수(郡守), 병사(兵使) 등의 벼슬을 지냈던 분들을 기리는 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