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다산초당엔 초당은 없다.

천부인권 2015. 1. 31. 09:31

 

 

 

<2015/1/16 초당이 아닌 다산초당 전경>

 

봉곡평생교육센터 운영위원회의 활성화와 단합을 겸한 워크샵 둘째날은 새벽같이 땅끝마을을 다녀 온 후 숙소에서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귀가할 준비를 모두 마친 뒤 강진군의 다산초당청자박물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산초당(茶山艸堂)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801(순조 1) 조선시대 이단(異端) 탄압과 집권층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된 천주교도와 남인(南人) 세력에 대한 탄압사건인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歸鄕)을 오게 되었다. 이곳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牧民心書)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곳이다.

 

 

 

 

다산초당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만덕산 줄기의 산중턱에 홀로 위치해 있는데 차량으로 간다면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39-2번지로 가는 것이 가장 초당과 가깝게 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일행들은 진입 도중에 보이는 다산수련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마을 산책로를 따라 다산초당으로 걸어서 갔다.

만덕리를 지나면 산길로 접어드는데 초당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사람들이 오가다보니 오래된 나무뿌리가 오솔길의 계단을 이루고 있어 시인 정호승씨는 뿌리의 길이라는 시를 남겼다.

 

뿌리의 길 -정호승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밝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 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할

길이 되어 눕는다.

 

 

 

 

나무뿌리가 내어준 산길을 지나면 울퉁불퉁한 조각난 돌길이 이어지는데 빗물에 흙은 씻겨가고 돌들이 들어나 자연적 계단을 이룬 길을 걷노라면 다산이 겪었던 귀양의 맛을 조금은 알듯하다.

 

 

 

 

초당으로 이르는 마지막은 가파른 돌계단으로 이루어 졌는데 다산초당보다 먼저 서암(西庵)이 보인다. 다산이 제자를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으로 원래 윤단(尹慱)의 산속 정자였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거처로 제공된 곳이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와가로 복원했다. 다성각(茶星閣)이라 불렀던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했던 곳이다.

 

 

 

 

 

다산초당(茶山艸堂)의 옥호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글이라 전하는데 실재로 김정희가 쓴 것이 아니라 추사의 글을 한자씩 모아 붙여서 만든 것이라 전한다. 건물은 정면 5, 측면 2칸의 도리단층기와집으로 1958년 지역민들이 무너진 건물을 복원하여 사적 제107(정다산유적 丁茶山遺蹟)로 지정받았다.

이후 1970, 1971,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할 당시에는 이곳의 건물은 초가집이었을 것인데 복원하여 사적으로 지정된 이곳의 건물은 번듯한 기와집이라 초당은 처음부터 없었다. 정약용의 뛰어난 학덕도 말로만 초가집이고 실재로는 권력을 누리는 양반의 모습을 버리지 못한 이중인격의 모습으로 만든 기와집은 후대 사람들의 욕심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정약용의 이름값도 못하게 하는 모양새이다.

다산초당에 정약용이 머물면서 귀양살이에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선비가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진 다는 것은 꿈이며 로망인데 다산초당이 정약용에게는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초당에서 가까운 백련사에는 절친한 벗 혜장(惠藏)이 있고, 제자들이 500권의 방대한 저술에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 정리, 편집 등을 해 주는 동시에 초당을 가꾸는 일에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산초당의 마당에는 다조(茶竈)라는 평평한 자연돌이 놓여 있는데 이 돌은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차를 끓이는 부뚜막'으로 사용된 것이라 한다. 이 돌 위에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약천(藥泉)에서 받아온 물로 찻물을 만들었다는데 다산초당의 제3경이라고 한다.

 

 

 

 

초당 옆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직사각형의 조선시대 전통의 연못이 만들어져 있는데 연못의 중앙에는 둥그런 석가산(石假山)이 조성 되어 있다. 연못의 위쪽은 돌로 쌓은 계단식 공터가 보이는데 예전에는 이곳에 차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한다. 즉 계단식 차밭이었다는 것이다.

다산초당의 연못을 연지(蓮池)라하고 석가산과 합쳐 연지석가산이라 하는데 동양의 음양사상을 드러낸 것으로 연지가 네모인 것은 땅을 의미하고 중앙의 둥근 석가산은 하늘을 의미한다.

 

 

 

 

 

 

연지를 지나면 송풍루(松風樓)라 불리는 동암(東庵)이 있다.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용한 책들을 갖추고 기거하던 곳으로 손님을 맞이하던 곳이다. 다산은 대부분 이곳에서 집필을 했으며,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동암은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한다.

 

 

 

 

 

 

동암에서 백련사로 향하는 산길 옆에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었던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의미를 지닌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여 천일각이라 부른다한다.

 

 

 

 

다산초당의 뒤편 자연암석에는 丁石이라는 글이 있는데 다산 정약용이 직접 새긴 것이라 한다. 참 다양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