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이순신과 원균 장군의 통곡이 들리는 듯한 장문포 왜성

천부인권 2015. 2. 1. 07:30

 

 

<2015/1/22 거제 장목면 장문포왜성>

 

장문포 왜성(長門逋 倭城)19981113일 경상남도 문화재지료 제273호로 지정이 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의 왜적 성곽이다. 이 성곽은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130-43번지에 위치하며, 장목만 서쪽 입구에서 북쪽으로 돌출한 산(107m) 정상부에 있다. 바다건너 마주보는 500m거리의 산 정상부는 송진포왜성으로 장목만의 입구를 함께 지키는 모습으로 만들어 졌다. 장목만의 밖으로 나가면 곧 칠천해(漆川海)이고 칠천해를 빠져나가면 마산만과 진해만을 마주한다.

 

 

 

<위성 사진으로 본 장문포왜성의 위치와 송진포왜성 그리고 마산, 진해만>

 

 

<장문포와 송진포가 장목만의 입구임을 보여주는 위성지도>

 

이 위성지도를보면 원균이 칠천해전(漆川海戰)에서 괴멸되는 이유를 바로 알 수 있다. 적군의 아가리에서 숙박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임을 알게 하는 전투가 칠천해전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했던가? 이곳을 주둔지로 삼은 도고 헤이하치로(18481934)’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그래서 왜놈들에게 있어 진해는 "진격 하면 승리하는 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之자 모양의 마직막 관문의 모습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견고함을 자랑한다.>

 

장문포 왜성(長門逋 倭城)은 산의 정상과 능선의 2개소를 삭평한 뒤 돌로 쌓아 올렸으며, 동쪽과 북쪽의 바닷가에서도 석축이 확인된다. 현존 성벽은 둘레 710m, 높이 3.5m, 너비 3.5m 정도로 내륙에 쌓은 왜성에 비해 작은 규모이나 많이 훼손되어 있다. 남아있는 부분을 보면 언덕 정상 가운데에 본성을 두고, 그 양 옆으로 제2성과 제3성을 배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길게 흙으로 쌓아 구부러지게 연결된 북쪽 끝에 다시 총구를 두었다.

 

 

 

 

<성곽 정상부의 석축이다. 아마도 이 위에 천수각(天守閣)과 같은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난중일기에는 "1594929일(양력 11월 11일) 맑다. 출항하여 장문포 앞 바다로 마구 쳐들어 가니,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는다. 진지를 구축한 양쪽 봉우리에는 누각이 높게 솟아 있고, 항전하러 나오지는 않는다. 선봉의 적선 두척을 무찔렀더니 뭍으로 내려가 도망가버렸다. 빈 배들만 쳐부수고 불태웠다. 칠천량에서 밤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문 : 二十九日 甲辰發船突入長門浦前洋 賊徒據險不出高設樓閣 築壘兩峯 略不出抗先鋒賊船兩隻?擊 則下陸逃遁空船撞焚漆川梁經夜]

 

장문포와 송진포의 왜성에 천수각(天守閣)과 같은 건축물이 있었던 듯하다. 1593년경에 왜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鳥正則) 7,430인이 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한다. 이 장문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장목진을 설치하여 왜구 침략에 대비하였다.[참조 : 장문포 왜성 앞 안내판]

 

 

 

<장문포 전투에 대한 원문과 해석 및 10월 6일까지 의 기록을 남긴다.>

 

[甲午] 十月 [年表] 初一日率忠淸水軍節度使及先鋒諸將入永登浦

  충청수군절도사와 선봉의 제장을 인솔하고 영등포에 들어가다.

 

 

[年表] 初三日往長門倭兵畏不敢出

장문포에 가니 왜병이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初一日 乙巳與忠淸水使及先鋒諸將 直入永登浦 則兇賊等掛船水濱 一不出抗日暮還到長門浦前洋 則蛇渡二船掛陸之際賊小船直入投火火雖未起而滅 極爲憤痛右水使軍官及慶尙水使軍官 略論其失 蛇渡軍官 則重治其罪二更 還到漆川梁經夜

새벽에 떠나 장문포에 이르니 경상 우수사(원균), 전라 우수사(이억기)가 장문포 앞바다에 머무르고 있었다.나는 충청수사(이순신)와 선봉 여러 장수와 함께 바로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로 들어가니 흉적이 배를 물가에 대어 놓고 하나도 나와 항전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오니, 사도 2호선이 뭍에 배를 대려고 할 즈음 적의 작은 배가 바로 들어와 불을 던지니 비록 (불이) 일어나지 않고 꺼졌지만 매우 분통할 일이다. 우수사 군관과 경상수사 군관이 실수한 것을 대략 논하고{꾸짖고} 사도 군관은 그 죄를 엄히 다스렸다. 2경에 칠천량(거제시 하청면, 칠천도)으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初三日 丁未親率諸將 早往長門 終日相戰 賊徒畏不出抗日暮 還到漆川梁

  제장을 친히 이끌고 장문포로 일찍 갔으나 종일 서로 싸우려 하였으나 적도가 두려워하여 나와 항거하지 않았다. 저물녁에 칠천량으로 돌아오다 

 

 

初四日 戊申與郭再佑金德齡等約束抄軍數百下陸登山先鋒先送長門使之出入挑戰晩率中軍進迫水陸相應則賊徒蒼黃失勢奔走東西陸兵見賊揮劍 旋卽下船還陣于漆川宣傳官李繼命持標信宣諭敎書到內賜貂皮

  곽재우 김덕령 등과 약속한 뒤 군사 수백을 뽑아 상륙하여 산을 오르게 하고, 선봉을 먼저 장문포로 보내어 들락날락하면서 도전하게 하였다. 늦게 중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수륙이 서로 호응하니 적도가 갈팡질팡하여 기세를 잃고 동분서주하는데 육군은 적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도로 배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날이 저물어 칠천량 진으로 돌아오다. 선전관 이계명이 표신(標信)과 선유 교서(宣諭敎書)와 임금이 내려준 초피(貂皮, 담비의 털가죽)를 가지고 왔다.

 

 

初六日 庚戌早使先鋒 送于長門賊窟 則倭人牌文揷地其書曰 日本與大明 方和睦 不可相戰云倭奴一名 來到漆川山麓欲爲投降故昆陽郡守招降 載船問之 則乃永登倭也移陣于? 

일찍 선봉을 장문포 적의 소굴에 보내니 왜인이 패문을 써서 땅에 꽂았다. 그 글에 일본은 대명과 바야흐로 화목하려하니 서로 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노 1명이 칠천량 산기슭에 와서 투항하고자 하니 곤양군수가 불러 항복하게 하고 배에 싣고 물어보니 영등포 왜적이었다. 진을 흉도로 옮기다.

 

 

 

 

장문포왜성 서쪽 성곽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산의 정상부에 쌓은 석성이라 이곳을 진격하려면 꽤 힘이 들것으로 보인다.

 

 

 

북쪽 바다방향으로 만들어진 성곽 진입부이다. 사진으로는 경사와 之자 모양의 길이 잘 보이지 않지만 층층으로 이루어진 之자 모양의 성으로 들어 오는 길은 입구에 몇 명만 지키면 쉽게 침범하기 힘든 왜성 구조이다. 이순신 장군이 몇 일간 장문포 인근에 머물며 전투를 하지만 성을 공격하지 않고 바다에서만 공격을 한 이유가 이런 요새와 같은 성을 빼앗기 위해서는 많은 군사를 동원해야 하고, 설사 군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많은 피해를 보고서야 함락할 수 있는 곳이다.

 

 

 

 

바다방향인 북쪽에서 올라 오는 길은 3단의 성곽을 통과해야 정상부에 어를 수 있도록 성을 쌓았다. 위 사진은 아래에서 올려 본 모양이다. 난중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적은 육지에서 바다로 나오지 않았고, 조선수군이 의병과 합하여 연합작전을 벌이지만 뾰족한 전술과 전과도 없는 상태를 유지 한다. 이런 적극적이지 못한 전투 때문에 선조는 이순신을 처벌하고 백의종군케 하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순신장군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통탄할 일이겠는가?

 

 

 

 

북동쪽의 성곽이 남아 있는 모습인데 아직도 튼튼한 성곽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할 때 원균장군은 왜선을 격멸하기 위해 해전을 하다 왜적의 유인술에 이끌려 대마도까지 배가 흘러가는 힘든 싸움을 하고 밤이 되어서야 겨우 쉴 수 있는 곳에 도착한 곳이 바로 장문포 앞 칠천량이었다. 노를 젓던 격꾼들은 피곤함이 극한에 다달았고 보초마져 임무를 잊을 만큼 힘들어 졸고 있을 때 칠천량에 정박해 있던 조선 수군의 배를 왜적이 공격을 하여 조선 수군 중 도망간 12척의 배만 남고 모두 괴멸 된 곳이 바로 이 장문포 앞 바다인 칠천량이다.

 

 

 

 

이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은 태풍 앞에 놓이 등잔불처럼 초라해 졌으며 원균장군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고 아직도 시체도 찾을 수 없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통곡소리가 장문포 왜성에 서보니 지금에도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