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왜성을 처음으로 찾아간 때는 2005년 4월 19일이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나라를 수호하고자 목숨을 내던진 이순신장군의 격전지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였고, 임진왜란이 끝 날 때까지 단 한 번도 함락할 수 없었던 왜성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문화재로 지정된 왜성들을 찾아보기 시작 했는데 안골포왜성과 거제 장문포왜성, 남해 선소왜성 등 임진왜란의 격전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처음으로 찾아갔던 웅천왜성을 2005년 당시에는 안골포왜성으로 잘못 기록을 하여 글을 적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당시에는 안내판이 없었거나 안내판이 잘못 설치되어 있었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아니면 내가 착각을 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카메라 가방을 울러 메고 산길을 조금 오르니 창원신항만 개발로 바다를 매립하여 육지가 되어버린 섬이 아닌 수도와 그나마 남아 있는 가덕수로(加德水路)가 보이기 시작한다.
2005년도의 기억을 더듬어 웅천 괴정으로 갔더니 어디인지 잘 생각도 나지 않고 웅천 남문지구개발로 인근 땅의 모습이 확 달라져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헤매다가 어떤 분의 도움으로 웅천왜성으로 들어가는 산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차량이 산 중턱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길이 험해 조심해야 한다. 산중턱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곳에는 간이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어 조금은 편리한 면이 있다. 그리고 산 등산로 옆으로 진해구에서 차나무를 심어두어 세월이 흐르면 차 생산도 가능해 질 것으로 보여 진다.
웅천왜성(熊川倭城)을 남산왜성(南山倭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산이 웅천읍성의 남산(南山)으로 풍수 의미상 중요한 산이기 때문이다. 남산의 오른쪽 아래 동네가 현재 괴정이라는 마을인데 옛 삼포왜란의 근거지가 되는 제포왜관이 있었던 곳이다. 괴정마을 옆 우측 산에 제포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곽의 흔적이 남아있다.
산 중턱에 차량을 주차하고 웅천왜성으로 향하는데 산속 입구에 “성역화를 위한 「웅천왜성 산상미사」에 초대합니다.”라는 펼침막이 붙어 있어 천주교인들이 종교를 위해서라면 국가도 부정하는 작태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이곳 남산에 왜성이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1592년(宣祖 25)부터 1593년(선조 26) 사이로 알려져 있으며, 1593년 12월 28일 스페인 선교사 세스뻬데스 신부가 천주교 신도였던 임진왜란의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행운과 조선침략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우리 땅에서 천주교 미사를 최초로 행한 장소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침략의 성공을 기원하는 종교의식을 올린 곳인데 이런 곳을 성역화 하자고 한다는 것은 나라를 또 다시 일본에게 또는 외국에 넘겨주자는 논리와 같다. 어떤 잡놈의 새끼가 서울시장이 되자 자기 것도 아닌 서울시를 개독교 종교단체에 ‘봉헌(奉獻)’했는데 이런 의식들이 난무하다 보면 나라는 기필코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곳을 문화재로 등록한 것은 역사적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시는 이 땅이 왜적의 노략질에 빼앗기지 않도록 늘 생각하고 살아가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곳이다.
그런데 천주교도 인은 이 땅의 억울함은 보지도 않고 단지 침략자의 앞잡이에 불과한 세스뻬데스 신부란 작자가 미사를 올린 곳이라고 성역화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는 나라를 부정하는 매국노가 할 짓이다.
처음으로 보이는 웅천왜성은 웅천읍성 방향의 육지에서 올라오는 조선군을 막기 위한 성곽으로 성의 중심지인 산 정상에서 산 아래로 일직선으로 이어진 성곽의 중간 지점이다. 조선의 성과 왜성이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런 모양의 복잡하고 길다란 성곽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성곽은 전투를 하면서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구조가 되었을 것이다.
점점 산 정상부로 접근을 하니 꽤 웅장한 성곽의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성곽의 모서리가 무너져 내리긴 하였지만 아직도 견고해 보이는 왜성을 보게 된다.
‘之’자 모양의 성곽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사진인데 양쪽의 성곽이 좁혀져 있어 이곳을 통과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안쪽으로 접근 했다고 하더라도 내부 공간이 넓지 않고 또 다시 성곽으로 둘러진 입구를 만나게 되어 쉽게 진입했다가는 몰살당할 수 있는 구조이다.
왜성의 안쪽 곳곳엔 성곽으로 오르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어 전투에 신속하게 성곽 위로 오를 수 있는 구조이다. 그리고 성곽의 중심인 천수각이 있는 장소에 가까워지니 젊은이 둘이 성위에 앉아있다.
<2015/2/6 웅천왜성 안쪽의 다양한 통로가 있는 모습>
<2015/2/6 웅천왜성 모습>
<2015/2/6 웅천왜성 천수각이 있었던 혼마루 입구 모습>
<2015/2/6 혼마루에서 와성마을 방향으로 본 웅천왜성 모습>
웅천왜성의 안내판이 있는 혼마루 천수각 터 위에 올라 사진을 찍어보니 혼마루 아래에 여성 한 분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두 남자의 생김새에서 못 느꼈던 일본인에 대한 이미지가 여성을 보자 ‘왜놈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을 걸어 보니 한명이 우리말을 조금 할 수 있어 대화를 나누었는데 자신들은 왜성이 좋아서 왜성 구경을 위해 한국에 오게 되었으며, 다른 왜성도 구경하고 싶지만 일정이 바쁘다는 말을 했다. 전남 화순 쌍봉사의 화원승(畵員僧)인 풍계현정(楓溪賢正)이 대둔사 천불을 모시고 가던 중 동래에서 서풍을 만나 일본으로 배가 떠내려가 일본에서 겪었던 일과 일본의 풍습 등을 기록한「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의하면 “왜(倭)라 말하면 싫어하고 일본(日本)이라 말하면 좋아 하더라.”는 글처럼 이들도 왜성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일본성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들은 침략을 통한 일본의 확장을 보고 싶었을 것이지만 한반도에 살고 있는 침략을 당한 입장의 나로서는 이순신장군의 승전지(勝戰地)를 보기위해 왔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미래에도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해 온다면 이 땅에는 임진왜란의 그 때처럼 이순신 같은 사람이 또 나올 것이라는 말을 전했지만 뒷맛이 씁쓸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태블릿에서 웅천왜성의 조감도를 촬영하여 왜성의 전체적 형태를 볼 수 있었다. 웅천왜성 산 아래 와성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이 왜성을 축조할 당시 왜군이 거주했던 집들이 있었던 장소라는 것을 이들이 보여준 조감도를 보고야 알게 되었다.
<2015/2/6 혼마루에서 바라본 바다풍경>
<2015/2/6 혼마루 아래쪽을 본 모습>
<2015/2/6 웅천왜성에서 만난 일본 관광객>
<2015/2/6 423년이 지난 천수각의 지붕을 덮었던 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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