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록들/여행 이야기

불모산에서 천자봉으로 가는 산행

천부인권 2015. 2. 28. 07:36

 

2015/2/19 음력 설 불모산

 

음력 새해 첫날 아들과 불모산 정상에서 시루봉(熊巖)까지 산행을 하기 위하여 창원터널을 지나 재짐고개(상점령)를 거쳐 불모산 정상에 주차를 하고 佛母山(불모산)에서 熊山(웅산)를 향해 산행을 시작 했다.

 

불모산(佛母山 : 801m)은 지리상으로 창원시 성산구 성주동(聖住洞)과 진해시(鎭海市) 웅동동(熊東洞), 김해시 장유읍(長有邑) 대청리를 경계 짓는 산이지만 세종실록지리지(창원)에는 토산으로 "사철(沙鐵)이 부 남쪽 악상리(岳上里) 부을무산(夫乙無山)에서 난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부을무산이 불모산의 다른 이름이고, 악상리는 불모산리 즉 현재 불모산동의 옛 이름으로 여겨진다. 부을무산의 '부을'''로 서쪽을 뜻하고, ''''로 산을 뜻하므로 김해의 서쪽에 있는 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취무산(吹無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 자 또한 불, 곧 서쪽을 뜻하므로 부을무산과 그 유래가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부 남쪽 30리 지점에 불모산이 있으며 철이 산출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불모산 [佛母山, Bulmosan]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2011.12, 국토지리정보원)>

 

불모산에서 바라본 웅산과 장복산

 

해동지도(昌原)에는 聖主寺(성주사)가 묘사되어 있으나 현재 불모산의 남쪽에 있는 웅산(熊山)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영남지도(창원)의 불모산에는 웅신사(熊神寺)가 묘사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읍치 남동쪽으로 약 30여 리 떨어진 곳에 불모산이 묘사되어 있다. 읍치 북쪽의 천주산(天主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전단산(栴檀山), 남쪽으로 장복산(長福山)과 이어지며 김해와의 경계를 이룬다. 현재 불모산 북쪽에는 신라 때 창건된 성주사가 있다.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비인 허왕후의 일곱 번째 아들이 지금의 불모산에 입산하여 중이 된 까닭에 허왕후를 불모(佛母)로 여겨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조선지지자료(마산)에는 불모산리가 상남면에 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불모산 [佛母山, Bulmosan]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2011.12, 국토지리정보원)>

 

 

불모산에서 본 성주사

 

국토지리정보원의 자료에서는 불모산의 유래를 허황후와 관련하여 정확하지 않는 설이라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불모산은 이름 그대로 석가모니의 어머니 산이란 뜻으로 이 산 이름의 유래는 가야국(伽倻國)을 만든 김수로(金首露)의 부인이 되는 인도 야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 189)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옛 지명이 전단산(栴檀山)”인 정병산이다. 전단(栴檀)이란 인도에 있는 식물인 전단향나무를 이르는 말로서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전단나무로 만든 평상에서 석가모니를 낳았다하여 불교의 탄생을 전단나무에 비유하는 것이다. 그런 전단산이 불모산 자락에 함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성주사의 어수각(御水閣)의 유래에서 찾을 수 있다. 어수각이란 성주사 입구의 샘 위에 얻었던 뚜껑 같은 바위에 새긴 글귀인데 김수로와 허황옥의 7번째 아들이 이곳 곰절에서 중이 되어 아들을 만나러 이곳에 들렀던 김수로왕이 물을 먹은 곳이라 한다.

그 왕자들의 스승은 장유화상으로 용제봉 아래 김해 방향에 있는 장유사(지암사)에 그의 사리탑이 있으며, 인도의 남방 불교를 가야국에 직접 전한 인물로 허황후의 사촌 오빠로 기록 되고 있다. 지금의 김해 장유읍은 그의 법명이 지명이 된 경우이다.

 

 

 

 

불모산 정상의 송신탑이 있는 곳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약간 옆의 봉우리에서 구창원시가지와 진해구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불모산 자락에 터를 잡은 성주사 곰절을 사진으로 남겨 본다. 어릴 때에는 봄·가을 소풍만 17번을 곰절에서 보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창원 인근에서 곰절만 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음은 사실이다.

산행은 어느 듯 불모산과 웅산이 만나는 가장 낮은 계곡부에 다다랐다. 네 갈래의 산길이 이 곳에서 만나는데 성주사에서 웅천 백일마을로 가는 길인 모양 이었다. 이곳에 철조망이 쳐저 있어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6·25전쟁 때 미군이 뿌린 지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구간이라 창원시가 이곳의 지뢰를 올해부터 철거할 계획이라 발표를 하고 있다.

 

장복산, 불모산, 천자봉 방향이 만나는 삼거리 지점에서 불모산을 보면서

 

질펀한 오르막길이 끝나고 장복산과 웅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도착하니 등산지도가 세워져 있어 현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이곳에서 불모산까지 1.5Km이고, 시루봉까지 1.6Km라는 푯말이 있어 그렇게 믿고 산행을 했다. 나중에 위성사진으로 거리를 재어보니 이곳에서 시루봉까지 거의 2Km나 된다는 것을 알았다.

 

 

야생상태의 염소를 만났다

 

웅산은 창원시 성산구와 진해구 웅천과 진해시가지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고도 703m이다. 이곳에서 남쪽방향은 웅암(熊岩)과 천자봉(天子峰)으로 가는 산길인데 산등성이로 나있는 길을 따라 걸으면 아찔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암괴들을 만나게 된다. 깎아지른 절벽의 꼭대기 약간 편편한 암석 위에서 쉬고 있는 야생상태의 염소를 만났다. 진해구에 사는 석종근씨에 의하면 “2012년 진해 석동에서 도망간 염소 2마리로 주인은 김종년씨이며, 목줄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2년이 지나서도 두 마리의 염소는 사람이 5m정도까지 접근을 해도 누운 상태로 처다 볼 뿐 더 이상의 경계는 하지 않았다.

을미년(乙未年) 첫날 야생상태의 염소를 만났으니 행운이 온다고 믿어보기로 생각하고 산행을 재촉한다.

 

 

 

어느 듯 웅산에서 시루봉 가는 구간 중 가장 험한 곳인 청룡사 위쪽 절벽에 왔다. 웅산과 불모산 방향으로도 사진을 남기고, 앞으로 가야할 시루봉 방향으로도 사진을 남긴다.

 

시루봉이 아직도 멀게 느껴진다

 

깍아지른 절벽 사이로 진해구가 내려다 보인다

 

 

 

위험하긴 하지만 내려다보는 진해구의 청룡사도 사진으로 남겨 둔다. 건물도 몇 개 없는 작은 절이지만 몇 년 후에는 어떤 규모로 바뀌어 질지 모를 일이다.

 

망원렌즈로 당겨본 천자봉의 독특한 모습

 

바다가 있어 한층 아름다운 진해구는 옛 웅천의 지역이다.

 

 

지나 온 길에 본 염소가 자리를 떠나는지 움직이고 있어 망원렌즈로 찍어 보았다.

 

 

 

계곡과 계곡을 연결하는 출렁다리가 놓여 있어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에겐 가슴이 쪼그라 드는 느낌을 갖게한다.

 

 

억새 군락이 자리한 시루봉 앞은 잠목과 풀을 깎아 정리가 잘 되어 있다.

 

 

더디어 시루봉 정상에 도달했다.

 

 

 

시루봉은 한반도의 명산으로 신라 시대에는 국태민안을 비는 고사를 지낸 곳으로, 조선시대 초까지 산신제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정상에 우뚝 솟은 커다란 시루바위(시리바위, 웅암, 곰바위, 곰메)는 높이가 10m, 둘레가 50m나 되며, 조선 시대 명성황후가 순종을 낳은 후 세자의 무병장수를 비는 백일제를 올렸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시루봉은 한반도의 명산으로 신라 시대에는 국태민안을 비는 고사를 지낸 곳으로, 조선시대 초까지 산신제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정상에 우뚝 솟은 커다란 시루바위(시리바위, 웅암, 곰바위, 곰메)는 높이가 10m, 둘레가 50m나 되며, 조선 시대 명성황후가 순종을 낳은 후 세자의 무병장수를 비는 백일제를 올렸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날씨가 맑으면 이곳 시루봉에서는 우리의 잃어버린 땅 대마도가 보이고, 대마도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보니 많은 전설을 남기고 있다.

 

시리(시루)바위(甑岩) (1)

옛날 대마도(對馬島)의 한 역관(譯官)이 웅천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었다. 그 역관은 당시 이 고을에서도 이름난 기생과 꿀맛 같은 사랑에 빠져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그 기생의 이름을 아천자(雅天子)라 하였다.

그러다가 역관은 떠나고 홀로 남은 아천자는 돌아오지 않는 역관을 기다리며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기약 없이 떠난 님을 기다리며 날마다 시루봉에 앉아서 멀리 대마도를 바라보며 눈물짓던 기생 아천자는 그대로 망부석이 되어 버렸다. 훗날 일본 사람들이 이 바위를 히메이와(姬岩)라 불렀으니 이는 아천자의 애닮픈 사랑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전설은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임진왜란 때 왜선은 이 시루봉을 보고 위치를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조선은 명당이라 생각했고, 왜에게 치욕스런 곳이라 그 명당을 흠집 내는 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리(시루)바위(甑岩) (2)

지금의 녹산 일대에는 도자기의 원료인 백토가 많이 나온다. 따라서 이 고장에는 옛날부터 도공이 많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조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 나라를 침략한 왜적들은 이곳의 도공들을 많이 포로로 잡아 갔다.

고국산천을 떠나 낯은 이국땅에 포로 신세가 된 도공들은 망향의 시름을 달래기 위하여 시루바위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고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들이 잡혀갔던 일본의 이와데(岩手)현의 어떤 도기촌에는 시루바위의 모양이 남아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