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보호수와 노거수

내서읍 상곡리 회화나무 노거수

천부인권 2015. 4. 6. 07:15

 

 

 

<2015/4/3 상곡리 회화나무 노거수>

 

내서읍 상곡리 190-19번지는 신묘년 8(2011)李相禹(이상우)라는 분이 내서읍 상곡리 김씨 열부각옆에 願豊臺(원풍대)라 적은 비갈을 세워 두어 이곳 공원이 원풍대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 원풍대는 마을의 당산목인 회화나무로 인해 생겨난 공간이고 지금도 회화나무에는 제를 지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昌原鄕校誌(창원향교지)에는 수령이 400년으로 추정 되는 이 회나무는 옛날 이 마을을 지나면서 말을 타고가면 이상하게도 말의 발자국이 떨어지지 않아 下馬(하마)하여 걸어서 가야하는 터의 기운이 센 곳이라고 전해온다. 또한 이 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科擧運(과거운)을 터준다고 전하고 있어 주민들이 守護祭壇(수호제단)을 건립하여 洞祭(동제)를 음력 정월 초5일에 모시다가 祭冠(제관) 선정의 어려움으로 지금은 음력 1225일로 정하여 동제를 모시고 있다. 1985년에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내서읍 상곡리(上谷里) 회화나무 노거수라 명명하는 이 나무가 처음 이곳에 심어질 때에는 화개산 지맥이 광려천을 향하여 벋어 오다가 산자락을 비켜 앉으면서 혈을 맺는 자리였을 것이다. 지금은 돌로 쌓은 축대로 인하여 단처럼 우뚝 솟아 있지만 예전에는 지맥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오는 동산 같은 땅이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이 회화나무를 할아버지 당산나무라 부르고, 남쪽으로 8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西臺(서대)의 느티나무를 아들 당산나무라 부르며 동제를 같이 지냈지만 지금은 회화나무에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 회화나무는 창원향교지의 내용처럼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지 않았다. ‘내서읍 상곡리 회화나무 노거수는 상곡리가 만들어질 당시에 누군가가 심었다고 가정할 때 약 400년 정도가 될 것이고, 가슴높이 둘레는 320cm이며, 나무 높이는 15m 정도 이다.

 

 

 

 

 

 

 

 

<2015/4/3 상곡리 서대 느티나무>

 

아들 당산나무라 불리는 상곡리 西臺(서대)에 위치한 느티나무는 100년 정도 되어 보이고, 가슴높이 둘레는 210cm 정도 이며, 높이는 13m 정도이다.

 

 

 

 

이 당산나무 아래에는 대한제국의 멸망이라는 비극을 함께한 창원지역 유림의 통곡을 담은 西臺(서대)라 적은 비석이 있어 지역의 역사를 아는 분들이 귀중히 여기는 곳이다. 요즘 새로 세운 서대의 해석비문에는 아래처럼 적어 두었다.

 

 

 

 

 

내서면 상곡리 읍산재 뒤에 있는 이 서대는 이 마을에 살던 성주이씨 원순이 1918년 광무황제 승하 시에 北向望哭(북향망곡)하던 곳이다. 이원순 공의 자는 도여(道汝), 호는 소여(小廬)라 하고 조선말 철종 1418631110일 상곡리 출생으로 어릴 때부터 재주가 능하야 주경야독()하며 부모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셨다. 가훈을 준수하여 수신제가, 우국충정 또한 유별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 이후부터 1918년 광무황제 昇遐(승하) 시까지 오백년 국조 회복치 못하고 종묘사적이 망한 것을 통탄하기를 부모상 당한 것처럼 망곡자실 통곡하였다하여 친족 및 향민 일동의 뜻으로 대를 모으고 비를 세웠다한다. 대지 기증자 외손 심재완

 

 

 

 

이원순(李元淳)[1863~1932]은 농사와 책읽기를 업으로 삼고 어버이 섬김에 정성을 다하는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었으며 가정생활에도 검소하였다. 초야에 묻혀 살았으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8년 고종 승하 시까지 조선 멸망을 슬퍼하여 상곡리 14~5 뒤편에 대를 모으고 매일 북향재배(北向再拜)했다. 고종의 죽음을 접하였을 때는 종묘사직이 망한 것을 통탄하기를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통곡하다 실신하기도 했다.[출처 : 디지털창원문화대전]